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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May 03. 2021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이직이 많으시네요?" 

아니면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하셨네요?"


내 속을 시끄럽게 하는 질문들이다. 질문이 첫 번째 방식으로 들어오면 나도 방어를 위해 가드 올릴 준비를 한다. 커리어나 면접에 대해 조언하는 글을 읽어보면 저런 질문에도 유연하게 잘 대처하라고 하는데 쉽지가 않다. 내가 겪은 바로는 실제로 그 이유에 대해 궁금해하기보다는 흠을 잡으려 드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도 사람을 채용해본 입장에서 충분히 궁금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저 질문의 배경에는 '우리 회사에서도 금방 나갈 수도 있겠네'라는 가정이 깔려있다. 


두 번째 방식으로 들어오는 건, 빈정대는 의도가 아니라면 견딜 만하다. 설명하면 되니까. 정말 호기심을 갖고 나의 경력을 바라봐 준 회사들도 꽤 있었다. 그럴 때는 마치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에서 일하다 온 사람처럼 쿨하고 자신만만하게 나의 화려한 경력을 말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속에는 겸양의 미덕을 중요시하는 조선인과 눈치로 먹고사는 K-직장인의 지분이 너무 많았다. "너는 외국에 있었으면 진짜 좋은 경력인데 한국이라 너무 아쉽다."라는 검은 머리 외국인 친구들의 말로 위로를 삼고, 인천 길병원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의 장녀로 자란 나의 출생을 탓했다. 


어차피 나 혼자 떠드는 것이니 조금 신박한 개소리를 해보겠다. 나는 단 한 번도 '지금 회사가 너무 별로이니 회사를 옮겨야겠어.'라는 생각으로 이직을 해본 적이 없다. 도망친 적은 없었다는 말이다. 궁금한 것,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아 남들보다 더 자주 시도했고, 감사하게도 좋은 기회가 주어졌고 난 그것을 잡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잡으려고 하면 잡혔다. 일을 시작한 지 12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남들보다 좀 자주 옮기긴 했구나 하는 정도이지 당시에는 내가 잦은 이직을 저지르고 있고, 먼 훗날 이걸로 골치가 아프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나의 직장생활은 내 기대치에 한참 못 미치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나는 부지런히 올라가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봤자 똑같은 월급쟁이인데 무슨 소용인가 싶지만 나는 어떻게든 증명하고 싶었다. 내가 이 정도 회사에 갈 만한 사람은 된다고, 실력이 없어서 못 간 게 아니라고. 듣도 보도 못한 작은 에이전시에서, 모두가 가고  싶어 하는 종합광고대행사로, 그리고 마케팅 예산을 수십억씩 쓰는 광고주로, 결론적으로 나는 내가 꼭 가고 싶었던 회사, 가고 싶었던 포지션, 딱 그 자리에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호시절이 길지 않았다. 증명의 기쁨은 짧았고, 조직의 쓴맛은 길었다. 


결국 그렇게 가고 싶었던 회사에서 잘 버티지 못해 방황하는 동안 회사 동료 몇 명이 나에게 창업을 제안했다. 그때마저도 나는 이게 나에게 또 찾아온 기회라고 생각했다. 스타트업 판이 슬금슬금 커지고 있을 때였고, 이것 또한 좋은 커리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부터는 쓴맛의 ‘어나더 레벨’이었다. 얌전하게 회사에 눌러앉아 있었더라면 겪지 않아도 될 험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올라가려고 아등바등하던 직장생활 초기 지점보다 훨씬 더 열악한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시원하게 말아먹었다는 뜻이고 내 커리어는 소위 말해 대차게 꼬였다. 


세상 탓, 남 탓을 할 만한 주변머리가 없던 내가 제일 먼저 두드려 패고 미워했던 건 나 자신이었다. 그게 제일 쉬웠다. '왜 그렇게 회사를 자주 옮겼을까?', '한 회사를 3년씩은 다녔어야 했나?' 등등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쓸모없는 질문들을 스스로 많이 던지며 나를 소모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복기한다고 달라지는 게 없는데 말이다. 그러다 면접에서 잦은 이직과 관련된 얘기를 들으면 필요 이상으로 주저앉아버렸다. 너희처럼 이렇게 체계 없는 회사에 나만큼 다양한 경험을 가진 사람을 안 뽑으면 누굴 뽑을 거냐고 눈을 시퍼렇게 뜨고 말을 해야 했는데 나는 애초부터 그럴 만한 위인이 못되었다. 


그렇게 꼬박 1년을 놀았다. 회사를 안 다니면 죽는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어딘가로 출근하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물론 그사이에도 여기저기 면접을 보러 다니고 주저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했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질문들도 당연히 많이 받았다. 새삼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든 나의 경력을 한 코에 꿰어보려 했고, 발전적인 양 포장하려 애썼다. 하지만 회사들은 생각보다 잘 속아주지 않았고 나도 나를 미워해 가며 포장하고 보여주는 것에 흥미를 잃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 속상했다. 정말 열심히 일했고, 늘 새롭게 적응해야 하고 배워야 하는 환경이 두려웠지만, 그 누구보다도 기꺼이 나를 던지며 쌓아온 경험과 경력이 쓸모없는 것이 된 느낌이 들어 억울했다. 나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많은 탓에 내가 인정할 만큼의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 이상 무언가에 좀처럼 확신을 하는 일이 없다. 그런 나에게 있어 '나의 일'은 내가 확실히 좋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었고, 나의 자부심이자 자존심이었다. 어떤 회사에 채용되는 것과 내 역량의 크기가 반드시 비례한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복되는 거절에 나는 점점 쪼그라들고 있었다. 


'그런 너의 경험을 잘 포장해서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도 능력이지.'라는 이름의 몽둥이가 새롭게 등장하려고 할 때, 나는 구직을 멈췄다. 그리고 당장 손에 잡히는 일들을 시작했다. 친구 남편 회사에서 급하게 도움을 요청했던 기획 컨설팅이라든가, 좋은 제품을 만들고도 포장을 잘하지 못해서 어려움을 겪는 작은 회사의 브랜딩을 한다든가, '회사'라는 기준을 두고 생각했을 때 마다했을 법한 일들에 하나둘씩 손을 댔다. 내가 지금 보내는 시간이 나와 잘 맞는 회사를 만나기 위해 준비하는 혹은 기다리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버렸다. 드디어 회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나를 미워하는 일을 멈추고 지금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미워하는 마음은 좋아하는 마음과 등을 맞대고 있다고 한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회사들을 미워하고, 나의 지난 시간을 미워하다 못해 나를 미워했던 시간은 아마 내가 그것들을 너무 좋아하고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달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과 나를 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정해주는 4대보험의 맛도 맛이거니와 일하는 게 너무 재미있었다. 학교도 정말 신나게 다녔던 나는 회사에서 일하는 게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다고 생각했다. 일하며 지지고 볶는 과정에서 마음고생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늘 하고 싶은 것들을 적극적으로 선택했고 질렀기 때문이다. 매번 투덜거리긴 했지만 지나고 보면 그 시간이 꽤 마음에 들었다. 


그 시간 속에서 지금껏 사랑하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나에게 늘 영감을 주는 예전 동료들, 반듯하게 일을 잘 하는 모습으로 나에게 간택되었던 전 남자친구, 일하는 동안 투닥거렸지만 지금은 술 한잔할 수 있는 협력업체 사람들, 언젠가 꼭 다시 한번 만나 같이 일을 하고 싶은 나의 팀원들, 그들과 함께하는 재미로 10년이 호로록 지나갔다. 아낌없이 일했고, 아낌없이 사랑했다. 그리고 그랬던 덕분에 혼자 뜨겁게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을 반복하느라 여기저기 그을린 내 일의 불판을 이제 새것으로 갈아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는 것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내가 관심 있어 하는 일을 하는 회사의 채용공고가 뜨면 나는 채용사이트를 기웃거린다. 예전처럼 나를 깎아 내려가며 거절당할 생각은 없지만, 재미있어 보이는 일에 나대는 심장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제 그 무엇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니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가 아닐까. 그렇다고 일방적인 구애를 계속할 생각 또한 없다. 아주 동등한 위치까지는 아니어도 서로에 대한 마음이 비슷한 수준이라고 생각되는 일부터 차근차근히 해볼 생각이다. 잦은 사랑은 이미 뜨겁게 많이 해봤으니, 이번에는 뭉근하게 오래 가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 


누가 봐도 봄을 부르는 봄비가 와서 그런가. 

섣부르게 설레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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