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던 때가 있었다. 뭐든 쿨하게 잊고 툭툭 털어버리는 사람이 아닌 나는 체력을 갈아 넣어 결코 생산적이지 않은 생각의 물레방아를 꾸역꾸역 돌리고 있었다. 그때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마음의 병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불면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출근하기 일쑤였고,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렸다. 그 좋아하는 음식에서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고, 살려고 꾸역꾸역 먹는다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껍데기만 둥둥 떠다니는 듯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내 맘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데 내 몸뚱이 하나 정도는 내 맘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모델 한혜진 님이 방송에 나와서 "세상 어떤 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지만, 몸은 제 의지로 바꿀 수 있다."고 말한 것이랑은 조금 다른 맥락이다. 그때의 나는 의지로 무언가 바꾸는 것보다는 잠을 좀 자고 싶었고, 두통이 없어졌으면 했다. 그저 내가 먹이고 굴리는 몸뚱이의 문제부터 좀 해결하고 싶었다. 그래서 집 근처 필라테스를 대충 검색해보고 퇴근길에 그냥 들러 바로 등록을 했다.
꼭 필라테스여야 했던 이유는 없다. 두통 때문에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녔을 때 목디스크 때문에 머리가 아픈 것일 수도 있으니 필라테스 같은 운동을 해보면 좋을 것 같다고 했기 때문이다. 마침 집 근처에 필라테스 학원이 있었다. 30회에 200만 원이 넘었다. 지금 같으면 가격에 바들바들 떨며 가격 비교도 해보고, 무료강습 같은 건 없는지 따져봤겠지만, 그때는 그럴 겨를이 없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냥 일시불로 카드를 긁었다.
그렇게 시작한 필라테스를 꼬박 4년을 했다. 싱글이었던 선생님이 결혼하고 출산을 앞두고 그만두는 날까지, 새로 등록해야 하는 무렵이면 원형탈모처럼 뭉텅이로 구멍 나는 카드값을 부지런히 메워가며 몸을 움직였다. 지금은 어느 시점부터 내가 잠을 푹 자고 머리가 아프지 않았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지만, 뭐든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미련하게 꾸준히 하는 성격 덕분에 나의 몸과 마음은 더 크게 나빠지지 않고 서서히 반등할 수 있었다.
열심히 운동해서 우울감과 두통을 극복했다는 식으로 딱 잘라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나아지는 과정에서 꾸준히 운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자기효능감이 극대화되었던 건 맞는 듯하다. 실질적으로 큰 연관성은 없더라도 마치 내가 내 몸을 움직여 건강해지고 이 상황을 내 힘으로 극복해 간다고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년 이맘때, 이제 좀 고만고만하게 흘러가나 했던 내 삶에 또 한 번 크게 브레이크가 걸렸다. 나이는 한참 더 먹었는데 졸지에 백수가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머리가 아파 필라테스 학원을 내 발로 찾아갈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때처럼 너덜너덜해지지 않았다. 나 자신도 '아니 이렇게 멀쩡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회사에 다닐 때보다 낯빛이 더 좋았다.
운동을 꽤 오래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마음의 한계를 뛰어넘을 만큼 체력이 좋아진 것도 아니고, 내가 갑자기 쿨한 성격으로 바뀐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차이는 단 하나였다. 지금의 나는 몸을 움직여 마음의 돌부리를 넘어본 경험이 있다. 그리고 이것이 어떻게든 지나가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이 어려움의 파편들이 가끔 내 일상을 흔들어버릴 때는 주섬주섬 운동복을 챙겨입고 나가면 조금 나아진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지금은 헬스장에 다니며 일주일에 한 번씩 PT를 받는다. 회사에서 받은 퇴직금을 헐어서 운동부터 결제했다. 헬스장에 가지 않는 날에는 하염없이 한강을 따라 걷는다. 누군가가 보면 백수 주제에 무슨 PT냐며 혀를 찰 수도 있겠지만(나조차도 처음엔 그런 이유로 망설였으니까) 나는 운동이 나를 끌어올려 주는 힘을 믿는다. 당장 그 효과가 눈에 띄지 않아도 어떤 기회와 합이 맞아떨어졌을 때 더 큰 폭을 내딛게 해줄 좋은 도움닫기가 되어줄 것이라고도 확신한다.
더불어 이제는 내 몸을 움직이는 과정 안에서의 기쁨 또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지난주보다 중량을 올려 근력운동을 하고, 근육통이 느껴지는 걸 뿌듯해하고, 걸으며 한강 저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고, 에어팟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나오고, 동작대교 위 편의점에서 사서 먹은 밀크티가 맛있었다는 사실들, 이런 것들이 기뻤다.
이런 기쁨들이 나의 일상을 채우니 슬픔과 우울함이 내 안에 똬리를 틀 공간이 별로 없게 되었다. 찾아오더라도 잠깐 들렀다 가는 정도랄까. 침잠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나는 스스로 꽤 잘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말 그대로 크게 아픈 곳 없이, 큰 슬픔 없이, 별일 없이 사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별일 없는 삶을 내가 이끌어간다는 사실이 더없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