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웃긴 건, 나 INFJ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나중에 해야지 하고 미루고 미루다 그리고 결국 아무것도 없게 되는 것이 여행기다. 그래서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 안에서 메모장으로 호로록 여행기를 남겨본다.
여행 간다고 할 때 다들 왜 경주냐고 물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정말 그냥 문득 떠오른 곳이 경주였다. 처음 가는 것도 아닌데 경주는 나에게 자꾸 가고 싶은 곳이었다. 맛있는 건 전라도에 훨씬 많고, 바닷가는 강원도가 더 가깝고, 어린 시절, 아빠 휴가 때마다 시골 할머니댁에 내려와 지긋지긋한 경북인데도 말이다. 사실 지금 해외여행 가기에 이만한 타이밍이 없는데 비행기 타는 것도 심드렁했던 나에게 경주는 가만히 있는데 이상하게 내가 애걸복걸하게 되는 그런 곳이었다. 주변에서 다들 3일이면 충분하다고 했지만 굳이 일주일이나 잡고 내려와 버렸다.
3일이면 충분하다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웬만한 명소들은 3일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나 같은 시간부자가 굳이? 하루 놀고 하루 쉬고 동네마실 다니듯 경주를 돌아다녔다. 대릉원, 첨성대도 세 번씩 보고, 같은 카페도 매일 가고, 해도 지기 전에 숙소에 냉큼 들어와서 씻고 누워 뒹굴거렸다. 그리고 마치 내가 경주 사는 주민인 것처럼 서울에서, 부산에서 친구들이 찾아와 주어 심심해질 만하면 같이 놀아주기도 했다. 마침 책방이 바로 붙어있는 숙소라 책방주인님과 오미자차를 마시며 수다도 떨고 마루에 앉아 하염없이 멍을 때리기도 했다.
일주일을 있어보니 경주는 바라는 마음의 도시다. 그게 무엇이든 무언가 바라는 마음으로 가득하다. 다른 나라가 침범하지 않길 바라든 내세에서의 평안함을 바라든 내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녕을 바라든 끝없이 바라고 기원하던 흔적이 1000년이 넘도록 이 도시에 차곡차곡 쌓여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큰 무덤에도 들어있고, 깊은 산속 바위에 부처님 모습으로 새겨져 있고, 흔적만 남은 절터에도 있다. 어쩌면 인간의 삶은 결국 이렇게 바라는 마음만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당장 마음이 볶이고 어려워도 그 또한 다 지나가고 그 볶이던 인간마저도 죽어 없어지고 마음들만 이러저러한 흔적들로 남아 나 같은 사람들의 눈에 들어오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나는 경주에서 마음을 가득 채워 올라간다. 사실 내려올 때만 해도 큰 기대가 없었다. 이 여행을 통해서 뭔가 얻고자 하는 것이나 특별하게 바라는 게 없었다. 그저 좀 가만히 있고 싶었는데 그러기에 제일 좋은 도시처럼 느껴져 내려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경주로 퇴근해 내려와 직접 뜨개질한 가방을 늦은 생일선물이라며 건네는 친구, 부산에서 부아앙 차를 몰고 올라와 하루를 꼬박 놀아주며 이런저런 못다 한 얘기를 나누어준 친구, 매일 아침, 저녁으로 손님인 나를 살뜰하게 챙겨준 호스트 송화님, 그리고 볼 때마다 나를 그렇게도 반가워하는 숙소 강아지 호두까지, 예상치 못하게 경주에 와서 만난 것들이 나의 마음을 자꾸 채워버렸다. 적당한 BGM만 있었다면 이미 눈물 한 방울 투둑-
고작 일주일의 여행이 뭐 얼마나 대단할까 싶지만 경주여행은 꽤 자주 떠올리게 될 것 같다. 내려올 때는 내가 괜찮은 상태인지 아닌지 긴가민가 했지만 막상 와보니 나를 늘 괴롭히는 불안감에 휘둘리지도 않았고 좋은 것을 좋게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뭐든 또다시 시작해 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어떤 한 뭉치의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냈을 과거 사람들의 흔적을 보면서 오늘의 나 또한 쫄지 말고 어깨 쭉 펴고 한 번 살아봐도 되지 않을까. 나의 일상과 마음이 다시 요동칠 때 지금의 이 감각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 둔다.
+ 사실 약간의 검색효과를 노리고 무계획 여행일정을 좀 공유해 볼까 했는데 혼자 감성글로 빠져서 망한 것 같다. 대충만 좀 풀어보자면 대릉원, 계림, 동궁과 월지 묶어서 구경하시고, 국립경주박물관은 말 그대로 ‘국립’이라 그런지 전시 퀄리티가 무지 좋으니 너무 더운 날 피서 가시고, 양산 있으시면 좀 더워도 천년보고(수장고)까지 가보시고, 차 있으시면 불국사, 석굴암, 감포바닷가, 문무대왕릉 묶어서 가시면 좋을 듯. 아, 그리고 힐튼호텔 로비 팥빙수가 맛있다. 경주는 맛집 없는 걸로 유명하나 커피는 커피플레이스, 피자는 도미, 함양집 한우물회는 웨이팅이 기니까 참고하시길. 회 잡숫고 싶으면 감포 가서 드시는 걸로. 길이 자전거 타기 딱 좋으니 두발 자전거도 배워오시면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