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일제문소 Oct 13. 2023

호우, 시절

가을이었다

요즘 간혹 예전 생각들을 한다. 다행히 껄무새는 아니어서 가지 않은 길이나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별로 없는 편인데 그 타이밍,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훅 올라오는 일이 잦다. “그 일이 지금 일어났으면 더 듬뿍 느끼고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를 때 찾아와서 너무 아쉽다, 나 새끼 진짜ㅠㅠ” 뭐 이런 종류다. 기본적으로 엄살이 심해 그 시절에도 울고불고 나 힘들다고 징징대면서도 최선을 다했겠지만 한참이 지난 지금 우연히 그 시간을 떠올려보면 나의 그릇이 모자라 미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구관이 명관이다’ 계열이라고 하기엔 좀 더 깊고,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계열이라고 할 만큼 아련하지는 않다. 과거에 가졌던 것을 지금은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니 하는 구질구질한 상상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아무튼 포인트는 시절이다. 내가 품어낼 수 있는 그릇과 알맞은 시절이 만났을 때 주는 그 충만한 기분을 이제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다. 예전에는 한없이 아쉽고 부족함을 느끼기만 했는데 이제 나도 ‘그래. 뭐 이 정도면 됐어. 퉁쳐‘하고 넘길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호우시절>은 늘 은은하게 생각나는 영화다. 누가 인생영화 이런 걸 물었을 때 1순위 대답으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의외로 괜찮았던 영화를 추천하게 될 때 항상 얘기하곤 한다. 허진호 감독 영화인데도 안 본 사람이 꽤 많더라고. 그의 영화가 늘 그렇듯 뭐 엄청난 기승전결은 없다. 여러 번의 시절을 비껴간 두 남녀의 이야기이고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제목처럼 돌고 돌아 비로소 두 사람의 좋은 때를 만난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멜로영화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어긋나는 전개는 새로울 게 없지만 뭔가 터지는 감정 없이 시간이 시절을 향해 슬슬 흘러가는 그 느낌이 기존의 영화들과 좀 달랐다. 습도가 너무 높지도 않고 촉촉하게만 딱 젖도록 적당히 비가 내린 대나무숲 같다.


정우성이 두산중공업 차장님으로 나오는 판타지적 설정만 제외한다면(근데 진짜 해외 출장 나온 피곤하고 구부정한 차장님 연기는 꽤 좋았다) 허진호 감독 특유의 고운 결이 있고 푸른 배경의 포스터도 좋아서 한동안 방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두보의 시에서 가져왔다는 <호우시절>이라는 제목도 막상 중국어 제목 계열로 놓고 보면 <중경삼림>, <첨밀밀> 같은 느낌일 수도 있지만 스물다섯 예솔전에게는 괜스레 아련하고 있지도 않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바로 읽을 수 있는 한자와 그렇지 못한 한자의 차이인 건가?). 그리고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좋은 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서야 호우‘시절’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것인가 싶다.


시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무모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만 했던 그 시절의 내가 자꾸 보여서 머쓱해지는 걸까. 그때의 미숙함이 만들어낸 여러 에피소드들이 이제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보니 그때의 내가 조금 부러워서 그러는 걸까. 과거로 돌아가게 해 준대도 절대 갈 생각이 없는 1인으로서 이런 회고의 감정이 드는 것이 참 낯설다. 좋게 해석해서 나도 이제야 비로소 인생의 큰 산을 하나 넘고 숨을 고를 수 있는 시절이 온 것이면 좋겠다. 한참 뒤의 나는 지금을 떠올리며 또 시절을 운운할 게 뻔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지금들이 미래에서 떠올리는 호우시절이 될 터이니 지금의 멱살을 잡고 또 들들 볶아가며 재미나게 사는 수밖에.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생각과 말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가을이었다.

이전 04화 안 헤어질 결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