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었다
요즘 간혹 예전 생각들을 한다. 다행히 껄무새는 아니어서 가지 않은 길이나 지나간 일에 대한 아쉬움 같은 건 별로 없는 편인데 그 타이밍, 시절에 대한 아쉬움이 훅 올라오는 일이 잦다. “그 일이 지금 일어났으면 더 듬뿍 느끼고 누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를 때 찾아와서 너무 아쉽다, 나 새끼 진짜ㅠㅠ” 뭐 이런 종류다. 기본적으로 엄살이 심해 그 시절에도 울고불고 나 힘들다고 징징대면서도 최선을 다했겠지만 한참이 지난 지금 우연히 그 시간을 떠올려보면 나의 그릇이 모자라 미처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자꾸 눈에 밟힌다.
‘구관이 명관이다’ 계열이라고 하기엔 좀 더 깊고,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계열이라고 할 만큼 아련하지는 않다. 과거에 가졌던 것을 지금은 가지지 못하는 상황이니 하는 구질구질한 상상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아무튼 포인트는 시절이다. 내가 품어낼 수 있는 그릇과 알맞은 시절이 만났을 때 주는 그 충만한 기분을 이제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런다. 예전에는 한없이 아쉽고 부족함을 느끼기만 했는데 이제 나도 ‘그래. 뭐 이 정도면 됐어. 퉁쳐‘하고 넘길 수 있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에게 <호우시절>은 늘 은은하게 생각나는 영화다. 누가 인생영화 이런 걸 물었을 때 1순위 대답으로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의외로 괜찮았던 영화를 추천하게 될 때 항상 얘기하곤 한다. 허진호 감독 영화인데도 안 본 사람이 꽤 많더라고. 그의 영화가 늘 그렇듯 뭐 엄청난 기승전결은 없다. 여러 번의 시절을 비껴간 두 남녀의 이야기이고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린다’는 제목처럼 돌고 돌아 비로소 두 사람의 좋은 때를 만난다 뭐 대충 이런 내용이다. 멜로영화에서 사랑하는 남녀가 어긋나는 전개는 새로울 게 없지만 뭔가 터지는 감정 없이 시간이 시절을 향해 슬슬 흘러가는 그 느낌이 기존의 영화들과 좀 달랐다. 습도가 너무 높지도 않고 촉촉하게만 딱 젖도록 적당히 비가 내린 대나무숲 같다.
정우성이 두산중공업 차장님으로 나오는 판타지적 설정만 제외한다면(근데 진짜 해외 출장 나온 피곤하고 구부정한 차장님 연기는 꽤 좋았다) 허진호 감독 특유의 고운 결이 있고 푸른 배경의 포스터도 좋아서 한동안 방에 붙여놓기도 했었다. 두보의 시에서 가져왔다는 <호우시절>이라는 제목도 막상 중국어 제목 계열로 놓고 보면 <중경삼림>, <첨밀밀> 같은 느낌일 수도 있지만 스물다섯 예솔전에게는 괜스레 아련하고 있지도 않았던 시절을 그리워하게 만드는 느낌이었다(바로 읽을 수 있는 한자와 그렇지 못한 한자의 차이인 건가?). 그리고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좋은 때’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할 수 있는 지금에 와서야 호우‘시절’이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것인가 싶다.
시절에 대한 그리움보다는 무모하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만 했던 그 시절의 내가 자꾸 보여서 머쓱해지는 걸까. 그때의 미숙함이 만들어낸 여러 에피소드들이 이제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다 보니 그때의 내가 조금 부러워서 그러는 걸까. 과거로 돌아가게 해 준대도 절대 갈 생각이 없는 1인으로서 이런 회고의 감정이 드는 것이 참 낯설다. 좋게 해석해서 나도 이제야 비로소 인생의 큰 산을 하나 넘고 숨을 고를 수 있는 시절이 온 것이면 좋겠다. 한참 뒤의 나는 지금을 떠올리며 또 시절을 운운할 게 뻔하다. 하지만 결국 모든 지금들이 미래에서 떠올리는 호우시절이 될 터이니 지금의 멱살을 잡고 또 들들 볶아가며 재미나게 사는 수밖에.
먹고사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생각과 말이 많아지는 것을 보니, 가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