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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Jun 09. 2023

천년고도의 귀여움

귀여우면 지는 거다

경주에 왔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으로 찾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강릉이나 부산 같은 곳에 가는 마음과는 다르지 않을까 싶다. 일단 나는 조용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많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다 지나가버린 오래된 것들이 나는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들이야말로 무용함으로 따지자면 세상 제일 쓸데없는 것인데. 나는 앞으로 달려 나가기보다는 자꾸 곁을 보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라 그런가 보다. 아무튼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들을 차분하게 좀 두어보려고 일주일 넉넉하게 잡고 기차를 탔다.


시골 할머니댁 사랑방 같은 숙소에 들어와 보니 이곳에 묵었던 사람들 마음도 나와 비슷했던 모양이다. 지친 마음을 달래러, 마음이 시끄러워서, 쉬고 싶어서 등등 방명록을 들춰보니 도시의 밥벌이에 탈탈 털리고 도망치듯 내려온 사람들의 흔적이 그득했다. 한가로운 시골에 짱박힌다고 인생이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을 모두가 다 잘 알고 있겠지만 그래도 나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찾은 궁여지책이 이 작은 도시의 시골방이라는 것에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목표까지는 아니지만 나름 이번 여행의 컨셉은 동네에 널려있는 무덤들을 보며 인간은 왕이든 노비든 어차피 다 죽고 별거 없으니 지금의 혼란함에 너무 일희일비하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지금 마음 쓰이는 피사체를 사소하게 만들어버리기 위해 시간을 광각으로 확 키워버린달까. 과거에서 답을 찾는 편인 내가 나름대로 찾아낸 해소방식인데 나는 꽤 효과가 있었다. 가끔 현재와 미래로 너무 힘들 때 평일에 꾸역꾸역 연차를 내고 박물관에 가서 그냥 좀 앉아있다가 온다.


숙소에 짐을 대충 던져놓고 10년 전쯤 친구들과 왔을 때 기억에 남고 좋았던 곳만 더듬더듬 찾아다녔다. 대릉원, 계림, 월성, 동궁과 월지, 그냥 경주 가는 사람이면 다들 가는 곳들이다. 근데 나 혼자 걸어서 뽈뽈뽈 돌아다니는데 왜 이렇게 실실 웃음이 나는지. 남의 무덤 보면서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산 사람들 니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말든지’하고 별로 규칙도 없어 보이게 대충(?) 누워있는 고분들도, 인스타그램에 올리려고 고분 포토존에 줄 서 있는 사람들도, 황리단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이름과 인생네컷 가게들도, 왜 이렇게 다 귀여운 거지. 원래 컨셉이 이게 아닌데.



귀여움은 모든 것을 이긴다는 말에 동의한다. 그리고 무언가 귀여워할 수 있는 마음은 상승의 감각이지 확실히 하강의 감각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 좀 먹고살만하다는 건가? 당황스럽네. 굳이 좋은 기분과 감정을 끌어내릴 이유도 없지만 낯선 곳에 와서 자꾸 귀여움을 발견하고 피식피식 웃음이 나는 게 좀 멋쩍다. ’그래. 인간은 다 죽고 부질없고…오 근데 저 고분 너무 귀엽당…아니 근데 왜 귀엽지(뒷통수 벅벅). 공유자전거 이름 타실라래. 이름 잘 지었다. 대박‘ 대략 이렇다. 누가 봐도 뭘 정리하거나 속 시끄러운 사람의 흐름이 아니다.


지금은 오후 2시, 인프제라는 mbti가 무색하게 아무 계획도 없이 방에 누워 숙소에 있는 경주 관련 책 몇 권을 들춰보고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실내에서 선크림을 바르고 앉아있는 나의 최화정적 모먼트도​ 너무 웃기고, 아침에 들었던 새소리, 맞바람이 치도록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오는 고운 바람도 좋다. 숙소에서 키우는 멍멍이도 내 마음 같은지 짖지도 않네. 문득 ‘지금 이렇게 좋아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내가 조금 안쓰럽다. 당연히, 마땅히 그래도 되는데 저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안 좋음을 가정한 인이 박혀있는 건가 싶어서.



귀여우면 귀여운 대로 좋으면 좋은 대로. 남은 시간은 더 그렇게 보내려고 노력해야지. 그게 비록 이 작은 시골방 궁여지책이더라도 ‘책’ 아닌가. 나를 구해내는 나만의 꾀라면 그것도 난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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