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결심>을 두 번 보았다.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제목처럼 헤어지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표현도 맞겠다. 헤어지고 싶지 않다. 나는 안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최근에 봤던 <탑건>과 함께 이 영화를 설명할 일이 많은데 <탑건>이 ‘아, 이래서 영화가 오락이었지’ 였다면 <헤어질 결심>은 ‘아, 그래 역시 영화는 예술이었지'라고 표현했다.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에 이렇게 푹 잠겨본 적이 얼마만인가. 연인과 헤어진 후에 그 사람을 사랑하는 그때의 나를 그리워하듯 어떤 영화를 보고 그것을 더 알고 싶어하고, 텍스트를 읽어보려하고, 만든 사람들의 인터뷰를 찾아보는 내가 너무 좋았다는 것도 고백한다. 무언가를 사랑하며 내 안의 온도가 올라가는 듯한 느낌이 참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같은 영화를 극장에서 두 번 본 적이 딱 한 번 있다. 중학교 1학년 때 강남역 시티극장에서 경미와 봤던 <접속>을 얼마 전 재개봉 때 같이 봤다. 물론 <접속>이라는 영화를 너무 좋아하지만, 그때는 20년 넘게 알고 지낸 절친과의 세러모니에 더 가까웠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을 다시 보는 건 너무 지루하다. 책이든, 유튜브든 내가 어떤 컨텐츠를 다시 본다면 그것은 아마 첫 번째로 봤을 때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했을 확률이 높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냥 모른 채로 지나가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헤어질 결심>은 그렇지 않았다. 온전히 그 영화를 더 느끼고 싶어서 3주 만에 서둘러 극장을 다시 찾았다.
첫 관람 때는 영화를 보기 바빴다. 위대하신 깐느박 감독께서 얼마나 설계를 촘촘하게 잘 해놓으셨는지 스릴러 아래 깔려있는 멜로는 영화를 부지런히 따라가고 난 끝에서야 한 대 맞은 것처럼 가슴을 사무치게 만들었다. 게다가 너무 잘하는 배우들의 연기대잔치를 보기도 바빴다. 깐느박 특유의 미술과 색감을 보기도 바빴고, 아무튼 너무 바빴다. 그래서 영화를 너무 재밌게 봤는데도 아쉬운 마음이 한가득이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이후에 더 집착하게 된 것 같다. 그날부터 <헤어질 결심>과 관련된 텍스트, 영상은 모조리 찾아본 것 같다. 내가 박찬욱을 이렇게 좋아했나 싶을 정도로.
그리고 지난 주말, 두 번째 관람을 감행했다. 꼭 이 영화를 스크린으로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첫 번째 관람에서 놓친 것들을 다시 한 번 눈에 담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스토리 전개에 필요한 내용을 다 알고 있으니 깐느박이 저 밑에 켜켜이 숨겨두었던 사무치는 사랑의 감정선을 한 번 따라가보고 싶었다. 같은 영화를 봤지만 다른 영화를 본 느낌이었다. 깐느박에 곳곳에 숨겨둔 장치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하지만 사랑과 그에 따른 상실을 아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참 잔인한 영화다. 가슴을 저릿하게 만든다는 표현으로 부족할 정도로 감정을 두들겨 패놓는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아주 대단한 사랑을 해본 것은 아니지만 내 감정을 뒤늦게 깨닫고, 무언가를 잃고, 그 이후의 지난한 시간을 겪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알 정도의 삶은 살아보았으니까. 나는 받아들이고 끝까지 선택해버린 서래보다는 자부심이라는 꼿꼿함(?)에 집착하고 자기 마음을 남보다 더 몰랐던 해준에게 몰입하고 있었다. 내 가슴을 두들겨 팬 것은 서래의 사랑보다 해준의 남은 나날들이었다. 저 사람은 이제 어떻게 살까. 그건 어쩌면 내가 어떻게든 살아낸 사람이기 때문에 드는 생각인지 아니면 그 시기를 너무 힘들어했던 사람이기 때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만약 이 영화가 극장에 계속 걸려있다면 나는 오며 가며 습관적으로 보러 갈 것 같다. 오며 가며 보고 또 보고 그럴 것 같다. 해준의 남은 나날들이 무뎌지고 무던한 일상이 그 파도치는 바다를 덮게 되어 더이상 궁금해지지 않는다면 멈추게 될까. 영화를 한 편 만드는 일을 평론가 이동진이 좋아하는 표현을 빌어 무언가를 ‘직조'하는 것이라고 하면 박찬욱 감독은 <헤어질 결심>으로 각도를 조금씩 바꾸어 보면 볼 때마다 다른 그림이 보이는 태피스트리 작품을 하나 만들어서 무심하게 걸어놓은 것 같다. 무심하게 걸어놓았다는 것이 포인트다.
나만의 안 헤어질 결심을 하면서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많이 찾아보게 되었는데 오랜만에 ‘이렇게 늙고 싶다!’하는 사람을 찾았다. 나의 눈에 비친 박찬욱 감독은 과도한 자의식 없이 담백하고 친절하게 늙어가는 재능있는 예술가다. 이미 나는 재능있는, 예술가, 이 카테고리에서는 한참을 벗어났지만 그래도 과도한 자의식 없이 담백하고 친절하게는 좀 더 노력해보면 가능하지 않을까. 아니 어떻게 좀 안될까. 제발. 무심한 듯 다정한 것이 제일 고급 스킬인데 박찬욱 감독은 이미 영화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대한민국을 넘어선 지구 영화계의 젠틀한 거장이 되어갈 채비를 다 마친 듯하다.
재능으로 충만하지만 모든 일에 담담한 이런 감독이 만든 가슴이 사무치는 멜로영화를 좋아하는 나. 뭔가 말의 앞뒤가 하나도 안맞는 것 같지만 언제 내 인생이, 내 사랑이 그렇게 아귀가 맞게 돌아갔던가. 붕괴를 깨닫기는커녕 두려워하다 정처없이 파도치는 바다를 헤매고 있겠지. 그래서 내가 더더욱 이 영화를 놓아주지 못하는가보다. 뒤늦은 사랑을 깨닫고 상실의 실체를 알아차리는 것보다 바다를 헤매는 게 나으니까. 이 영화 언저리를 뱅글뱅글 돌면 그래도 계속 가까이에 있는 것 같으니까. 안 헤어질 결심이 차라리 속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