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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Jul 28. 2023

<엘리멘탈>, 오늘부터 1등

픽사가 만들어 준 나의 취향 저격 울컥 버튼 모음집

사람들과 영화 취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나는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 안 본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마블 안보는 사람'이기도 하다. 이유는 현실감 없는 판타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하지만 판타지 안보는 사람으로 최종 판정받기 전에 내가 굳이 꼭 언급하고 가는 게 하나 있다. "근데 나 픽사 영화는 봐" 사실 허구의 농도로만 따지면 픽사는 이미 그 자체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가깝다. 장난감이 말을 하고, 집이 풍선에 두둥실 떠오르니 말이다. 게다가 이번에는 보이지도 않는 원소들의 이야기다.


어떤 이야기가 사람의 마음에 와닿을 때는 나의 경험(또는 경험적 체험에 가까운 정도의 생각)과 공명이 일어날 때가 아닐까 한다. 내가 겪은 것과 똑같지 않아도 된다. 그때 느꼈던 감정 위로 켜켜이 덮인 상황과 시간들을 하나하나 들어 올렸을 때 남아있는 그 감정 하나가 같다면 이미 그 이야기는 나의 것이 되어버린다. 픽사는 그런 이야기들을 참 잘 풀어낸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위한 애니메이션처럼 보이지만 픽사가 만드는 영화들은 언젠가 느꼈던 여러 감정들을 저 깊은 곳에 묻어두고 사는 어른들을 버튼을 사정없이 눌러댄다.


<엘리멘탈>은 내가 주로 반응하는 버튼들을 모두 가지고 있는 영화다. 그 버튼을 누르는 동력이 감동이든 눈물이든 스트레스든 내가 반응할 수밖에 없는 요소들을 다 가지고 있다. 가족, 부모님, 책임감, 내가 하고 싶은 일, 너무 다른 상대방에 대한 이해, 어려운 사랑, 그럼에도 다정한 사람 등 무엇 하나 피해 가는 것 없이 나를 탕탕 저격하는 스나이퍼다. 어쩌면 그동안 픽사가 보여줬던 사람의 내면 또는 관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영화를 보기 전, 홍보 콘텐츠들을 보면서 '한국계 미국인 감독이 자기 얘기했네' 정도로만 생각하고, 요즘 한국 핫하니까 이런 얘기도 픽사에서 해주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까보니 이건 픽사에서 보기 드물게 잘 만들어낸 사랑영화가 아닌가. 가만 생각해 보면 픽사에는 사랑이야기가 잘 없다. 카우보이 인형과 양치기 소녀 인형의 호감 확인 정도랄까. 오히려 더 깊은 감정을 다루다 보니 '한낱' 사랑 이야기는 굳이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것 같다. 또 뭐 그런 건 이웃이자 한 식구인 디즈니에서 주구장창 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머리로는 픽사 최고의 작품이 <토이스토리>라고 생각해도 칼과 엘리가 만나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고 이별하기까지의 장면을 빠르게 보여주는 <업>의 첫 시퀀스 때문에 시원하게 대답하지 못할 만큼 나는 픽사가 보여주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업>이 너무 아름답고 슬픈 나머지 초장부터 눈물을 쏙 빼고 시작한다면 <엘리멘탈>은 눈치 없이 나대는 내 심장을 깨닫고 어두운 극장에서 혼자 머쓱해지는 느낌이라 그 질감은 다르지만 <업>이 개봉했던 2008년 이후로 오랜만에 픽사 영화를 보며 두근두근 가슴이 뛰었다.


게다가 미국놈들의 주특기이자 픽사의 필살기 가족을 끼얹다니. 한국에서 꾸역꾸역 흥행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는 건 아마도 이민 간 적도 없는데 부모님을 떠올리며 오열하고 있을 대한민국 장녀들의 입소문을 탔기 때문이 아닐까.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과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나도 이제야 조금 잠잠해졌을 뿐이지 지금까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깊고 아픈 고민이었다. 나를 사랑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실망시켜야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딜레마는 정말 너무 괴로워서 죽은 셰익스피어 다시 불러다 K-장녀들의 4대 비극 하나 더 쓰고 가라고 하고 싶을 정도니까.


영화를 보고 나서 이러저러한 평들을 보니 픽사의 이전 작품들 대비 평가도 좀 박한 것 같고 글로벌 흥행도 생각보다 잘 안된다고 해서 마음이 아프다. 이쯤 되면 전세계 수억 명의 이민자들이 뒷심 좀 보여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나에게는 감독이 말하고 싶어 하는 조각들이 하나하나 다 와닿았는데 말이다. 엠버보다 더 엠버 같았던 내가 숱한 시간을 거쳐 웨이드가 보여주는 마음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를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어서 그런 것일 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제는 누군가에게 웨이드 같은 사람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아무튼 나는 오늘부로 나의 픽사 1등을 <엘리멘탈>에게 주기로 했다. 나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함께해 온 <토이스토리>도 있고, 불멸의 첫 시퀀스 <업>도 있고, 수많은 명작들이 있지만 예전의 나에게,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해주고 싶은 말은 <엘리멘탈>에 다 담겨 있는 것 같다. 너무 다른 것에 놀라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기꺼이 손을 잡아야지. 그리고 지금까지 잘 해온 것처럼 나를 위한 선택들을 또 열심히 해 나아가야지. 여러분, 늦지 않았습니다. 어서 영화관으로 달려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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