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하고 담백하게 헤어지기
이별은 늘 슬픔으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다. 가끔은 필요한 이별도 있다. 뭐 서로 마음이 남아있을 때나 그 헤어짐, 분리가 아쉬운 거지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나는 연애를 제외한 이별은 그래도 꽤 잘하는 편이다(남자친구랑 헤어질 때 하도 구질구질했어서 나를 아는 누군가가 볼까봐 찔려 그 부분에서는 예외임을 굳이 밝힌다). 이별이 필요한 타이밍을 잘 감지하고 실천으로 옮긴다. 주변 사람들이 놀라는 나의 결단력 지분의 대부분이 이별이다. 많은 사람들이 망설이고 어려워할 법한 순간을 나는 그냥 묵묵히 밀고 나가기 때문이다.
다 좋았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내 인생에 있어 몇몇 중요한 이별들은 적당한 시기에 이루어져 나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헤어짐을 결심하는 순간까지 오게 되면 나는 그 어떤 때보다 머리가 맑아지고 굳은 마음을 가지게 된다. 감정의 쓰나미에 정신을 못 차리던 사람이 급격하게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하나씩 칼 같이 정리를 시작한다. 굳이 '칼 같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평소에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던 모든 이성과 논리와 근거들이 입체적으로 발현되어 상황들을 판단, 정리하기 때문이다.
생긴 대로, 팔자 대로 살기로 결심했지만 사실 조금 아쉽긴 하다. 왜 내 마음은 항상 돌이킬 수 없는 순간까지 가서야 냉기가 삭- 돌며 제대로 된 판단을 하게 될까. 왜 그렇게 마음의 바닥을 보기 전에는 정확하게 감지를 못할까. 마음이 바닥으로 가는 과정에서 시그널을 좀 줄 수 있다면 이 관계를 조금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일까. 사람 인연 또한 인력으로 안 되는 일이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매번 반복되는 찬 공기 가득한 이별에 나도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든다.
사람에 대한 나의 기본 스탠스는 일단 믿음이다. 다 완벽하게 믿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누군가 어떤 얘기를 하면 맞겠거니 하고 믿어보고 시작한다. 그리고 계속 상대방을 겪어보면서 믿음의 마일리지를 쌓아가기도 하고 차감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과정을 크게 티 내거나 노출하지는 않는다. 굳이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의심이라는 행위 자체가 나에게는 너무 피로도가 높다. 그걸 상대방 모르게 막 머리를 써가면서 지속한다?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받아서 탄수화물 땡긴다.
문제는 믿음 마일리지 차감 과정을 나도 잘 감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100, 97, 92.... 85, 76...63 이런 식으로 조금씩 떨어져 갈 때 인지하면 더 와장창 떨어지기 전에 어떻게든 개선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나는 100, 50, 0 이런 폭으로 뚝뚝 떨어지니 손절 또는 상대방 입장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이별 같은 결과가 도출되기 일쑤다. 그 이별을 거치고 나면 나는 마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했던 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군다. 진짜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고 정말 그 사람과의 일이 잘 기억이 안 난다.
도토리묵 같이 좀 밋밋하고 심심하게 헤어지고 싶다. 형체가 없는 건 아니지만 부들부들하고 막 그렇게 자극적이지도 않고 나름 씹히는 맛도 있고 맨날 먹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가끔 생각나는 맛. 믿음 마일리지 소진으로 마주하는 이별은 직후에 후련한 것 같아도 시간이 많이 지나면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그 시간이 통으로 날아가버린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분명 그 시간 안에 좋았던 일들도 있었을 텐데 그런 것들을 다 놓쳐버리는 게 아쉽다. 다시 볼 일이 없더라도 별다른 감정 없이 담백하게 '잘 가시오.' '잘 계시오'하는 이런 이별은 어떨까.
이별이 굳이 아름다울 필요는 없는데 그래도 잘하는 방법은 있지 않을까? 나의 믿음 마일리지가 지금 32쯤에 있어서 우리 관계가 위태롭다는 것을 미리 알려줘야 하나. 정말 잘 모르겠다. 결국 이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양측의 의지의 문제인 건가. 어떤 관계를 그래도 내가 한 번 끌고 가보겠다고 마음먹으면 100을 쏟아붓다가 나가떨어지는 내가 문제인지, 나의 100이 영원할 줄 알고 30으로 대하는 상대방이 문제인지 알 수가 없다. 이래서 이별이라는 단어 곁에 '잘'이라는 부사가 잘 안 어울리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