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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May 29. 2023

이토록 평범한 미래

ChatGPT가 김치를 담가주나

열무김치를 담그는 아빠 옆에서 쪽파 두 단을 다듬었다. 부모님 댁에 얹혀사는 과년한 자식은 약간의 눈치게임을 해야 한다. 밖에서 노부부가 김치를 담그는데 어찌 싸가지 없이 방문을 콕 쳐 닫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는 농담이고 그냥 점점 나이가 들수록 가족과 보내는 사소한 시간들이 점점 더 사소하지 않게 느껴져 일단 뭔가 벌어진다 싶으면 엉덩이를 붙이고 본다. 회사 가서 뭐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아도 어차피 다 남의 일이다. 의미가 없다기보다는 당장 우리 식구 입에 들어가는 열무김치만큼의 실제적인(?) 존재감은 없다는 뜻이다.


아무튼 이 가정 안에서 실존하기 위해(??) 신문지를 두 장 포개어 깔고 쪽파를 다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집이 그렇겠지만 우리도 신문을 구독하지 않은지 한참 되어 집에 있던 신문들은 거의 몇 년 전 소식이 담긴 구문이 되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 집에 '신문'이 흘러들어왔는지 2023년 4월, 한 대학교수의 인공지능, ChatGPT 등이 가져올 미래에 대한 인터뷰가 실려있었다. 늘 '기술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고 핍박받았지만 아무렴 내가 이런 메시지를 다듬고 내보내는 사람인데 또 안 읽어볼 수가 없지.


나도 그러고 있겠지만 그냥 뻔한 내용이었다. 사라지는 일자리도 있긴 하겠지만, 잘 활용한다면 인간에게 더 이로울 것이다 뭐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약간 꼬인 마음으로 다시 말해보자면 일자리가 사라지는 것은 팩트고, 눈탱이 안 맞으려면 개인인 네가 잘 써라? 의 느낌이랄까. 기술로 염불을 외우는 사람들 곁에서 2년 정도 있어보니 이런 내용 또한 뭔가 의도가 있거나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잘 알 것 같았다. 저들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는 것이다. 이게 사회와 개인과 사회에 어떤 파장을 미칠 지도 생각 좀 해줬으면 좋겠구만.


그것은 돈 안 되는 문사철 또는 예술을 공부하는 이들의 몫인 걸까. 2년 내내 그 고민을 한 것 같다. 기술의 앞, 뒤, 옆에 모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심지어 그걸 만드는 너도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느끼게 하고 설득할 수 있을까. 결론만 말하면 완전한 설득에는 실패했다. 성공했으면 계속 그 조직에 남아 더 많은 사람을 설득하려고 했겠지. 사람들이 잘 쓰는 것보다는 기술 그 자체에 경도되어 달려 나가는 그 순수함이 부럽기도 했고 이해가 안 되기도 했고 여러 감정이 들지만 이 시간 또한 다른 무엇의 이유가 될 것이라 믿고 넘긴다.


눈으로 그 인터뷰를 다 훑고 다시 쪽파 다듬기에 집중했다. 눈도 맵고 허리도 아파 인상을 빡 쓰다가 '하긴 ChatGPT가 맛있는 열무김치 레시피는 다 긁어다 줘도 쪽파는 안 다듬어주겠지. 결국 김치 먹으려면 쪽파는 내가 다듬어야 하는데'하고 인간으로서의 효능감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리고 쪽파가 너무 좋아서 김치에 다 넣지 말고 부침개 부쳐먹어야겠다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올리는 엄마와 여러 유튜버와 블로그를 전전하며 시도한 끝에 본인만의 열무김치 비법 레시피를 갖게 된 아빠의 존재 또한 나의 실존감을 고취시켜 주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는 사실 두려움이 앞선다. 모르니까. 그런데 과거가 되어버린 구)미래들을 떠올려보면 언제나 그렇게 나쁘기만 했던가.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좋은 일, 나쁜 일 적당히 반반이었겠지. 내가 지나간 걸 잘 까먹고 회복탄력성이 좋은 것도 있지만 지금의 내 평범한 삶이 꽤 맘에 드는 걸 보면 앞으로도 그럴 거다. 그래서 굳이 나쁜 것을 앞세워 나의 오늘에게 불안함을 먼저 주고 싶지 않다. 불안이 이끄는 삶, 많이 살아봐서 안다. 두려움과 불안은 너무 크게 다치지 않을 펜스 쳐놓는 정도의 역할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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