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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일제문소 May 03. 2021

솔직하지 못해서

"솔삼아, 그때그때 솔직하게 말을 해야 알지."


같이 일하는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프로젝트를 하는 2달 가까이 나는 옛 사수이자 PM인 선배의 의견에 대부분 따랐고, 우리는 큰 갈등 없이 최종보고 직전까지 오게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최종보고 직전, 심하게 의견 충돌이 생겼다. 나는 평소와 다르게 선배의 의견을 조목조목 반박했고, 내가 느껴왔던 감정을 말하며 내 입장을 끝까지 고수했다. 선배는 얘가 도대체 왜 이러지 하는 표정으로 당황스러워했다. 


일하는 동안 납득하기 어렵고 화가 나는 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이스크림 한 통을 끌어안고 퍼먹든가, 한강 주변을 15km씩 걷는다든가, 장바구니에 잔뜩 담아놨던 책을 산다든가 하면서 일하면서 얻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불편한 것마다 하나하나 얘기해서 해결할 수도 있었겠지만 내 성격에는 잘 맞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혼자 감정들을 소화하고 정리하는 게 더 편했다.


선배는 늘 솔직함과 정확함을 강조하는 사람이다. 특히나 상대방의 이야기를 순발력 있게 논리로 격파하는 면에서는 발군이다.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돌려 말하지 않는 특유의 화법으로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는다. 선배의 태도가 부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던 나는 의견이 부딪칠 때마다 '그러려니' 하고 선배의 의견을 따라가는 때가 많았다. 


마냥 그의 의견에 동의하는 건 아니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그렇게 엄청난 정답이 있는 일도 아니었고, 내가 적극적으로 의견을 펼친다고 그게 정답이 될 것도 아니니 아주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는 이상 큰 틀에서 그냥 따라가자 이 정도의 이해하는 마음이었다. 빠르게 반박하며 실랑이를 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피로도가 높은 일이었다. 나의 이런 스탠스는 선배와 내가 적당하게 프로젝트를 잘 이끌어가기에 적당히 좋았다. 


그래서 이번 충돌은 우리에게 그리고 나에게 더욱더 낯선 것이었다. 나는 도통 그런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의견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크게 반발하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 그 관계가 어느 지점이었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게 나는 굉장히 너그러운 사람이고, 다른 누군가에게 나는 자기 혼자 말도 안 하고 꾹꾹 눌러 참다가 결국 터져 다시는 안 보게 되는 그런 꽁한 사람이 된다. 나에게 당한(?) 사람들은 말을 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른다는 말과 함께 나를 원망했다. 그리고 나는 충분히 이해했다. 나조차도 표현되지 않은 감정이나 말은 굳이 이해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는 제가 느끼는 걸 하나하나 다 말하지 않는 게 마음이 편할 때도 있어요"  


선배의 말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진심이었다. 솔직하게 말하는 건 좋은 일이다. 노이즈가 잔뜩 끼어있는 커뮤니케이션만큼 피곤한 게 없으니까. 나 또한 굉장히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솔직함을 만능열쇠처럼 사용하려는 사람들의 횡포도 많이 목격했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진심과 진실의 열쇠를 들고 덤벼도 열쇠 구멍이 다른 모양이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나의 모든 마음과 생각을 솔직함이라는 급행열차에 황급히 태우고 싶지 않았다. 내가 신나게 살이 찌고, 내 다리가 아프고, 내 돈을 쓰더라도 더 많이 생각하고 소화하고 이해하고 싶었다. 물론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번 선배와의 일처럼 목적지에 잘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를 알리는 이정표를 들이받아 버리기도 하니까. 


사실 이건 나의 욕심이기도 하다. 온라인에 숱하게 떠도는 고민상담 컨텐츠에 나오는 것처럼 좋은 사람 컴플렉스일 수도 있고,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잘 달래주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갈등 회피 성향이라 그럴 수도 있고, 미움받을 용기가 없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해보고 싶었다. 종종 실패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이해해보고 싶었다. 


결국 모든 일은 자기만족이다. 나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난 이후의 후련함이 좋았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갈등과 반목의 순간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의 침묵과 망설임은 '내가 모르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라는 생각의 토대 위에 이루어진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의 행위였다. 


앞으로도 나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측근들은 불만이 있으면 조금씩 표현을 하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는데 그게 갑자기 잘 될 것 같지도 않다. 아프다가 막상 병원에 가려고 하면 갑자기 괜찮은 듯한 느낌이 드는 것처럼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면 '뭔가 저쪽도 사정이 있겠지.'하고 일단 넘어가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먹고살 만할 때는 ‘세상에 내가 그렇게 또 이해 못 할 일은 뭔가.’ 하는 마음도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래서 좀 더 어려운 목표를 세웠다. 간접경험이든 직접경험이든 뭐든 더 많이 겪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일, 그 어려운 일을 내가 한 번 해내 보려고 한다. 그리고 계속 먹고살 만한 상태를 유지하려고도 애쓸 것이다. 자꾸 인간관계를 손절하는 이상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 애쓰는 것보다 비록 실패하더라도 더 깊고 큰 이해를 늘 시도하는 일이 더 멋있으니까. 그게 솔직하지 못한 나의 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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