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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뭐가 좋았나

어서 와 아프리카는 처음이지

by 제일제문소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다. 하지만 내가 빠니보틀, 원지도 아니고 여행을 업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적당히 엄선된 곳을 골라서 가야 하는 이슈가 있다. 내가 그랬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만약 독일 여행을 간다고 치자. 그럼 보통 가게 되는 곳은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드레스덴 같은 몇몇 주요 도시들이다. 물론 독일에 내가 모르는 엄청 좋은 곳들이 많겠지만, 나처럼 뜨내기 여행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저런 곳이 대부분이다. 조금 더 깊게 파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곳들을 둘러봐도 좋겠지만 마찬가지로 세계는 넓고 갈 곳은 많기 때문에 한 나라에 그렇게까지 여러 회차로 시간을 할애하는 게 솔직히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회사에서 눈치껏 쓸 수 있는 휴가는 보통 1주일, 약간 눈치 덜 봐도 되는 곳이다 싶으면 2주 정도다. 굉장히 자주 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아닌 이상 숨겨진 곳까지 깊게 알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여행지를 찾다 보면 보통 유럽, 미국, 동남아, 일본 이런 사이클 안에서 돌기 마련이다. 그것도 처음에는 신기하고 새로워서 괜찮지만 어느 순간 다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여행만이 줄 수 있는 그 새로운 감각이 확 열리며 '아, 내가 새로운 곳에 왔구나'하는 게 잘 안 느껴진다. 쳇바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감각이 주는 쾌감도 있지만 새로움이 주는 짜릿함이 덜해지는 순간이 온다.


새로운 여행이 필요한 시점이다. 모든 감각기관에 새로운 것이 입력되어야 한다. 구미가 당기지 않는 곳들을 제외하고 나에게 남은 것은 아프리카와 남미였다. 이 두 대륙을 가는 건 만만치가 않다. 이미 오며 가며 까먹는 시간이 다른 곳보다 훨씬 길고, 상대적으로 익숙하지 않은 마음에 가까운 일본이나 동남아 가듯이 선택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정말 큰 마음을 먹거나 먼 훗날을 기약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랬던 내가 이번에 큰 마음을 먹었다. 모로코에 가자. 모로코에 대한 정보는 아예 없었다. 스페인과 가까워서 다들 잠깐씩 들렀다 온다더라 하는 정도의 후문만 들었을 뿐, 어디 붙어있는지 뭐가 유명한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여행사 홈페이지 상세페이지를 읽어보니 다채로운 매력이 있다고 한다. 좋네. 이 나라 저 나라 안건너 다니고 모로코왕국만 10일 동안 돌아다닌다고 한다. 그것도 좋네. 호텔도 5성급이라고 한다. 그것 참 마음에 드네. 그래도 너무 모르고 가면 좀 그럴 것 같아서 여행 후기를 찾아봤는데 생각보다 별로 없다. 아주 좋네. 남들은 다 좋은 거 보고 오는데 나만 못 보고 올까 봐 눈에 불을 켜고 다녔던 예전에 비하면 아주 느슨하고 방만한 태도였지만 그랬기 때문에 나는 모로코에 더 푹 담갔다가 올 수 있었다. 그리고 모로코는 그래야만 하는 곳 같았다. 틀에 박혀 계획에 매여있으면 온전히 느낄 수 없는 곳.


1. '몸은 아프리카에, 머리는 아랍에, 눈은 유럽에'

이것보다 모로코를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위치상으로는 아프리카지만, 이슬람교를 바탕으로 문화가 발달했고, 유럽과 제일 가깝다 보니 유럽의 영향 또한 듬뿍 받아낸 곳. 여행시큰둥자들에게 내가 모로코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휴양부터 사막체험, 역사탐방까지 다 할 수 있는 모로코를 경험해 보고 그중에 제일 내 마음에 드는 경험에 깃발을 꽂고 다시 나만의 지도를 그려 나가기 시작하면 된다. 관광이나 휴양이 좋았다면 남아프리카로, 사막이 좋았다면 더 찐한 사막투어로, 역사가 좋았다면 문명으로 때려 박은 이집트로, 이런 식으로 새로운 여행의 물꼬를 트기가 너무 좋은 곳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표현이 조금 조심스럽지만 외부와의 교류가 많다 보니 약간 날라리 이슬람의 느낌이 있어서 외국인 여행자로서의 부담이 덜하다. 이슬람 국가지만 어찌어찌하면 술도 먹을 수 있어서... 라기보다는 문화적인 존중이 모든 것에 앞서야 한다면 좀 당혹스러운 경우도 많았을 것 같은데 그렇게 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저가항공 타고 몇 시간이면 날아오는 유럽 친구들이 이미 신나게 놀고 있어서 뭔가 오지체험 가는 느낌으로 가지 않아도 된다.


2. 들어오는 자극이 다르다

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과 내리쬐는 햇볕부터 다르다. 유럽에 가도, 미국에 가도, 어떤 역사적인 장소에 가면 다 비슷비슷한 건축물의 모습에 흥미를 잃었는데 이번에는 첫날 마라케시에 도착하자마자 '우와'라고 외쳤다. 어디에서도 경험할 수 없었던 빛과 미감이었다. 메디나의 좁은 골목길도 그렇고, 사하라 사막의 일출도, 쉐프샤우엔의 푸른 색감도, 핫산 2세 사원도 생전 듣도 보도 못했던 것들이었다.


맨날 똑같은 것들만 보고 살다가 너무 새로운 자극들이 쏟아지니 태업을 하고 있던 나의 자극세포들이 마구 살아나는 느낌. 마치 내가 해외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모로코였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풍경을 보는 것이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영화 로케도 많이 오지만 사진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온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너무 알 것 같다. 생전 프레임에 담아보지 못했던 것들을 찍는 짜릿함이 있다.


3. 1세계의 눈이 아닌 나의 눈으로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미국 편(?)이다 보니 이슬람이나 아랍문화권을 대할 때 약간 두려움을 깔고 가는 것 같다. 두려움은 잘 모르거나 불안할 때 생기는 것인데 그만큼 우리가 저 문화권을 잘 모른다는 뜻이 아닐까.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이 유독 대상화되는 것 같다. 그 또한 당연하다. 지리적으로도 너무 멀고 문화적으로도 교집합도 없으니 말이다. 간혹 국사책에 서역 상인이 신라까지 와서 교류를 했다 어쩌고 저쩌고 정도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우리 조상들이 그만큼 교역을 했다는 업적의 대상일 뿐, 구체적인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잠깐의 여행이었지만 내가 직접 경험하고 나니 오히려 그들의 문화가 더 궁금해졌다. "걔네가 그렇다던데?" 하는 썰로 이해하는 것과 곁에서 보고 이해하는 것의 온도차가 있지 않나. 아침마다 코란을 읽는 소리에 잠을 깨고, 길을 가다가도 기도 시간이 되면 메카를 향해 절을 하는 사람들을 직접 보니 이것 또한 그저 그들의 삶이구나 싶었다.


4. 새로운 즐거움의 접붙이기

좋아하면 더 알고 싶어진다. 이번 모로코 여행을 통해 잘 모르고 살았던 이슬람 역사, 문화의 퍼즐판이 눈앞에 놓였다. 지금까지 이어져온 세월, 그 널찍한 퍼즐판에 비하면 정말 단편적인 정보 몇 조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 몇 개를 바탕으로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역사의 실개천도 만나고, 큰 강도 만나고, 결국 바다도 만나게 될 것이다. 두께와 페이지수로 압도되는 세계사 책을 그래도 꾸역꾸역 읽게 만드는 힘은 이런 데서 온다. 내가 조각조각 알고 있던 것들이 결국은 한 흐름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을 텍스트를 통해 깨닫고 발견하게 될 때 그만한 재미가 없다.


그리고 내가 알아가고 싶은 카테고리가 하나 더 생겼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 궁금한 것 없는 것만큼 재미없는 인생이 또 있을까. 성서 속에서 읽던 예루살렘에 성지순례를 가서 느끼는 기쁨도 좋지만, 예루살렘에서 아예 믿음과 역사를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도 괜찮지 않나. 알고 갔어도 재미있었겠지만 보고 왔는데도 잘 모르니 궁금증의 강도가 더 세다. 새로운 문화로서의 이슬람은 이렇게 대놓고 내 즐거움에 접붙이기를 시작했다.


보통 이런 여행 후기 글에는 멋진 풍경 사진이 주르륵 달리기 마련인데 또 너무 텍스트로 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일단 나의 소감은 이렇다. 내가 무슨 한 달 살기를 한 것도 아니고 고작 열흘을 훑고 온 얄팍한 경험이지만 원래 또 겉핥기 한 사람들이 설레발은 일등 아닌가. 그리고 여러분과 아주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자란, 그저 대한민국 국민 1에 불과한 내가 이렇게 느꼈으면 다들 똑같이 느낄 거라 아직 말랑말랑한 이 느낌을 꼭 전달해보고 싶었다.


왠지 내가 이렇게 오바를 떨지 않아도 모로코 가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 같다. 이제 다들 유럽은 갈 만큼 갔고 새로운 곳을 찾고 있을 텐데 아프리카 엔트리레벨로 이만한 곳이 없기 때문에 더 각광받을 것이다. 대단한 이벤트가 있지 않는 한 인천-마라케시 직항이 생길 것 같지는 않으나 스페인 갈 때 겸사겸사 하루 이틀 묶어서 다녀오기에는 조금 아까운 곳이다. 아니 근데 생각해 보니 나는 스페인은 안 가고 포르투갈, 모로코, 환승하면서 터키... 그 언저리만 돌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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