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콘클라베>를 보고
트위터를 하다 보면 어떤 콘텐츠에 대한 스포를 피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지적이고 차분한 척하는 쌈닭들이 잔뜩 모여있는 이 꿀잼 소셜미디어를 안할 수도 없고.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결국 타임라인을 쭉쭉 내리다가 <콘클라베>의 스포성 게시물에 걸리고 말았다. 아카데미에서 꼴랑 각색상 하나 받아서 그래도 좀 피할 수 있었는데. 젠장...(그런 의미에서 <아노라> 미리 본 거 매우 칭찬한다)
완벽한 결말까지는 아니어도 대략 이런 내용이겠거니 하고 극장에 가게 되어서 약간 김이 샜지만, 천주교 신자인 나에게 <콘클라베>는 나에게 일종의 의무방어전이다. '효도관람'의 성격이 있다. 엄마와 적당히 취향의 갭 없이, 민망할 것 없이 문화생활을 할 수 있는 기회랄까. 예를 들면 명절에 수녀님들이 나온다는 이유로 <하얼빈>과 <검은 수녀들>을 두고 <검은 수녀들> 관람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뭐 그런 맥락이다. 다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뭐 또 그런 게 있습디다...
엄마의 영화취향은 생각보다 급진적이라서 꼭 종교적 색채가 너무 강한 영화가 아니어도 된다.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 같은 영화가 아니어도 된다는 뜻이다. 나도 이해하는데 한참 걸린 <에에올>을 보고 재미있었다고 하는 엄마를 보며, '올ㅋ'하기도 했다. <콘클라베>는 마침 나도 궁금한 영화였으니까 백화점 구경도 갈 겸 겸사겸사 나섰다. 극장에 가보니 서초구에 있는 성당 자매님 다 나오신 줄 알았네. 엄마 또래의 아주머니들이 가득했다.
영화의 재미부터 먼저 말하자면, 진짜 재밌었다. 그 이유는 내가 스포를 잘못 알고 갔기 때문이다. 처음에 반복되는 듯한 장면들이 나올 때는 약간 지루한가 싶었는데 웬걸? 저 통제된 환경과 한정적인 사건 속에서 빅 재미가 나올 수 있을까 하는 나의 우려는 진짜 기우였다. 오히려 그래서 더 쫄깃하고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는 맛이 났다. 결말도 내 입장에서는 너무 충격적이었다. 오히려 엄마가 결말에 대해서 더 잘 수용하고, 내가 꼰대처럼 '아니 그래도오~ 전통이라는 게 있는 데에~ 너무 멀리 간 거 아니냐며~'했다.
그리고 내가 늘 열광하는, 영화라는 예술만이 스크린을 통해 줄 수 있는 미감, 너무도 아름다워서 나는 이걸 극장에서 또 한 번 꼭 보리라 다짐했다. 아트나인의 작은 상영관에서 예매했다가 센트럴 메가박스 큰 극장으로 바꾼 나를 대단히 칭찬한다. 실제 콘클라베가 이루어지는 공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미술, 촬영구도, 색감 같은 것들이 아주 잘 '직조'되어서 그런 부분만 따라가면서 한 번 더 보고 싶어지는 영화였다. <헤어질 결심> 이후로 이렇게 그림만 따로 좀 떼어놓고 보고 싶은 영화는 오랜만인 것 같다.
'교황을 뽑는다'는 한 줄 줄거리만 생각하면 정말 무슨 살인사건이 나지 않는 이상 어떻게 재미를 줄 수 있을까 싶겠지만 영화는 주어진 틀 안에서 엎치락뒤치락하며 관객들을 끝까지 잘 데려간다. 바로 전에 본 영화가 <아노라>여서 그런 건지 스트립 클럽 정도는 나와야 할 것 같지만, 당연히 그런 것은 없고... 돋보기 없이는 글자도 안 보이는 영감님들이 아주 도파민을 팡팡 터뜨려준다. 나는 '매니저'인 로렌스 추기경이 마치 중소기업 성실한 과장님처럼 그 아사리판을 수습하며 꾸역꾸역 버텨 모두의 인정을 받는 영화로 알고 간 덕분에 말미로 갈수록 몰입도가 폭발했다.
내가 당한 게 있어서 스포가 될만한 내용을 쓰지 않을 거지만, '종교'와 '권력'이라는 너무 거대한 담론을 다루는 영화치고는 굉장히 세련됐다. 배우의 입을 빌어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도 없고, 비주얼도 너무 좋다. 하지만 그 와중에 피식 웃게 하는 위트도 있다. 사건을 전개하는 과정도 아주 매끈하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결말을 마주하는 순간, 위에서 말한 거대한 담론들을 논하는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나는 이런 영화들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한다. 2시간 남짓 되는 시간 동안 하나의 이야기를 본 듯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나를 확 돌려세우며 생각하게 만드는.
나를 돌려세워 '너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묻지도 않는다.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앞에서 차근차근 쌓아온 서사를 등에 업고 그저 빤히 쳐다볼 뿐이다. 원래 말없이 눈빛으로 전하는 서사가 더 강렬하지 않은가. <아노라>를 보고 와서도 그렇지만 요즘 좋은 영화가 왜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영화산업이 어렵다고 난리인데 나는 요즘 좋은 영화들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것 같다. 업계가 어렵다 보니 어중간한 영화들은 아예 제작도 안 되는 것일까? 투자, 배급하는 입장에서도 더 숙고하게 되는 것도 있을 듯하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려는 건 아니고 좋은 영화는 돈 아까워하지 않고 극장에서 볼 것이니 좋은 영화들이 더더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OTT나 플랫폼이 없던 시절에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게 '대중(이 즐기는)'문화의 큰 부분이었는데, 요즘은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자체가 어떤 예술행위에 참여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 같은 어중간한 간헐적 시네필이 더 좋은 영화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 같기도 하다. 빨리 <김혜리의 필름클럽> 들으러 가야지!
+ 아니 아카데미는 레이프 파인즈 남우주연상 줘도 될 뻔했는데 거참 (아직 브루탈리스트 보기 전임. 보고 오면 딴소리 할 수 있음 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