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자리인데 날짜만 지나네
이별 후 나아지는 과정은 아마도 점진적인 상승 그래프가 아니라 계단형일 것이다. 이때쯤이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단계가 찾아왔다. 공허함과 무기력함.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다. 슬픔과 분노를 지나 이제 의아함만이 남았다. 나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모든 감정이 빛바랜 기분이다. 반짝거리던 애정이 바스러진 뒤 그 자리를 채우던 분노, 배신감, 실망감이 이제는 모두 빛바랜 채 화석처럼 남았다. 요즘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아마도 외로움과 씁쓸함과 조바심. 오직 그뿐이다. 남아있는 감정이 오직 그뿐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쓸쓸함을 느끼고 외로워진다.
전 애인보다 더 빨리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기도 하고 그저 혼자 있고 싶기도 하다. 내가 괜찮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연애를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을 안다. 아직 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초조함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란 듯이' '훨씬 나은' 사람을 '어서 빨리' 만나고 싶은 조바심이 인다. 그거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를 만나기 전의 나는 분명 혼자여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땐 인생이 아주 심플했는데 이 관계가 끝난 뒤엔 연애의 공백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조차 불확실하다. 오히려 지금과 같은 감정이라면 그를 다시 만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다. 분노와 배신감이 사라져서 이제는 내가 그와 왜 헤어져야 했는가도 불확실해졌다. 그냥 만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렇게 무감각해질 거였다면?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에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행동과 기분을 조종하는 ‘감정’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그들이 주체인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것은 본부에 ‘조종판’이 있기 때문. 어느 날 여러 감정 중 둘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자 조종판이 굳어져버리는 장면이 나온다. 조종판 전체가 회색으로 물든 이후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때 사라진 감정은 ‘슬픔이’와 ‘행복이’. 결국 굳어진 조정판을 움직이는 것은 슬픔이다.
어쩌면 지금 내가 아무 감정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은 슬픔이가 잠시 파업을 했기 때문이지 싶다. 아마 다음 단계가 곧 찾아올 것이다. 그게 무엇일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단계는 이름 짓자면 ‘회색도시’ 단계다. 내가 누구인지도, 지금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는 텅 빈 상태. 이럴 거면 무의미하더라도 하던 연애나 계속할걸 그랬나? 싶은 자조적인 단계.
상사가 요즘 왜 그리 피곤해 보이냐는 타박을 하고, 친구들은 이제 내 이별이 아닌 다른 이슈들이 생겼다. 모두 내 이별을 극복했는데 오직 나만 아직 제자리이고, 한 달이 된 이별은 모두에게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다. 나는 이대로 나아가지 못하고 영원히 그대로일 것만 같은데 혼자 아직도 제자리에서 슬퍼하고 외롭고 쓸쓸한 상태. 왜 아직도 나아지지 못했는지 자책감마저 든다. 나는 왜 아직도 그를 생각하는지, 왜 홀로 외로운지.
버리지 못하던 선물 받은 인형을 드디어 버렸다. 헤어진 첫날 그 인형들을 보자마자 발작하듯 눈물이 터져 나왔는데, 버릴 땐 아무 감정 없이 봉투를 동여매고 수거 시간에 맞춰 정확히 문 앞에 내다 놨다. 그러면서 저녁에 집에 돌아왔는데 쓰레기 수거가 안되어있으면 어쩌지 하는 현실적인 걱정을 했다. 다행히 흔적 없이 수거가 잘 되었고, 그래서 며칠 뒤에야 내가 그의 마지막 남은 흔적을 내다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준 선물이며 남기고 간 티셔츠도 모두 버린 뒤였다. 아쉬움은 없었다.
그러니까, 상황은 모두 다음 단계로 넘어갔는데 아직 내 마음은 그대로인 지금. 모두들 입을 모아 얼른 연애를 하라는데. 이런 텅 빈 마음으로 대체 연애라는 걸 다시 할 수 있는 걸까?
감정의 조종판이 더 이상 고칠 수 없이 고장나버린 건 아닐까?
*표지 이미지 : <마지막 거인>, 프랑수아 플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