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는 둘이서 이별은 혼자
바람피운 연인과 헤어지는 일의 가장 나쁜 점은, 상대는 이미 다음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부터 이 이별을 딛고 일어나서 털어내고 닦아낸 뒤 눈물 젖은 얼굴로 다음 연애를 힘겹게 찾아 나서야 하는 마당에 전 애인은 이미, 나와 헤어지기도 전에, 다음 사람을 맞았다. 바로 이 점이 나를 가장 분노케 한다. 그놈이 뭐가 잘났다고 나보다 먼저! 그래서 슬픈 와중에 아직 애도가 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초조하게 다음 연애를 물색하게 된다.
분명 상대의 외도로 헤어졌는데 그는 괴로운 과정 없이 바로 ‘새로운 연애’라는 단계에 들어가 버렸고 아무 잘못이 없는 나 혼자만 슬픈 이별의 과정에 남겨져 있는 것이다. 이 상황이 너무나 아이러니해서 ‘내가 무언가를 잘못해서 이 괴로움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사랑하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것도 화가 나는데 벌을 받는 것도 나 혼자다. 이런 억울한 일이 다 있을까.
전 애인의 연애를 인정하는 법
지금까지는 전 애인이 다른 여자에게 ‘집적거리기’만 했고 그들이 사귀진 않을 거라고 굳게 믿어왔다. 전 애인 역시 나처럼 슬프고 외롭고 이별에 당황해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내 이별에 대해 들은 모든 사람들이 ‘아마 그 둘은 이미 사귀고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 얘기를 다섯 번째쯤 듣고 나니 내가 믿고 있던 건 사실 믿고 싶은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전 애인은 아마 지금쯤 나는 신경도 쓰이지 않을 것이다. 그가 연락이 없고 집에 찾아오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이미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 사실을 직시하자 기분이 마냥 씁쓸했다. 나는 지금 독방에 홀로 있지만 그래도 옆 방에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방도 비어있었던 격이었다. 진정 홀로 받는 형벌이었다.
헤어진 직후에는 펑펑 울며 그의 행복을 바랐다. 진심으로 그가 좋은 사람을 만나 평안하게 살기를 바랐다. 오늘은, 그때 내가 보낸 모든 진심을 다시 모아 저주로 되돌려 주었다. 하는 일마다 족족 망하길 바라고 무엇보다도 부디, 그 역시 언젠간 상대의 바람으로 이별하게 되기를 바랐다. 자신이 나에게 준 상처를 꼭 한 번은 그대로 되돌려 받기를.
그리고 패배를 인정하는 법
꼭 외도로 인한 이별이 아니더라도 모든 이별에서 전 애인이 새롭게 연애를 시작한다는 건 기분 나쁜 소식이다. 그 업계에서 최고 나쁜 뉴스는 ‘전 애인의 결혼 소식’. 왜일까? 왜 우리는 상대와 다시 사귀고 싶은 것도 아니면서 그가 애인을 사귀는 것에 불쾌해하는 걸까?
나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진 것 같아서’였다. 누가 먼저 연애를 하나 경쟁이 아닌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 기분이었다. ‘네가 없어도 난 더 좋은 사람과 얼마든지 사귈 수 있지롱!’ 이라는 어퍼컷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유치하다는 걸 안다. 하지만 기분이 영 그랬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나는 이미 졌고 이 경기는 한참 전에 끝났다. 이제 와서 조금이라도 덜 지려고 아등바등해봤자 소용이 없다. 경기를 복기할 필요도 없다. 다시는 같은 상대와 싸울 일이 없을 것이다. 그저 링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된다. 아직도 발이 떨어지지 않지만.
풍경이 되어야 걸어 나올 수 있으니
서로를 부둥부둥 보듬던 우리가 이제는 상대가 조금이라도 잘 될까 봐 저주를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간극이 어지럽다. 한 순간은 ‘그래, 저주를 해서 무엇 하리. 잘 살아라’ 싶다가도 뒤돌아서면 ‘아니야. 잘되긴 뭐가 잘돼? 확 망해버려라’ 싶다. 이 격차 때문에 내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었는지, 이제는 그 사랑이 얼마나 희미해져 가는지 여실히 느껴진다.
모두 지나갔을 때 내 마음에 오직 미움만 남아있지는 않기를. 사랑했던 마음과 키워둔 애정이 불같은 분노가 아니라 고운 재가 되어 그대로 내려앉기를. 내가 가진 여러 기억 중 하나에 머무르기를. 그리고 내가 어서 거기서 걸어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
*표지 이미지 : <Free Fall>, David Wies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