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29일째. 실패할 줄 알면서도 시작한다는 것

다시 누군가를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

by 하마

긴 연애가 끝난 뒤 새롭게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기준은 전 애인이었다. 그와 너무 닮아서 싫고, 그와 너무 달라서도 싫었다. 그를 조금이라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거절했다. 그러다 보니 남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외로움은 커져만 갔다. 사실 길 가다가 떡볶이집만 봐도 전 애인이 떠오르던 때였다.


여러 사람을 소개받고 새로운 사람과 커피를 마시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느낀 것은, 이 과정이 상처의 무게를 덜어내는 데에는 분명히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마음에 들든 그가 나를 좋아하든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든 상관없이, 새로운 이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연애를 좀 더 가벼운 것으로 만든다. 가슴 아프게 헤어지고 다신 누군가를 만날 수 없을 거라며 가슴을 쾅쾅 치던 단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주말마다 옷을 골라 입고 큰 기대 없이 또 누군가를 만나러 나가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기까지 아주 오랜 위로와 다독임이 필요했다.


다만 소개팅이 좋았든 나빴든 집에 돌아가는 길에는 언제나 씁쓸한 기분이 있었다. 분위기가 좋았다면 '선방했군', '근데 나는 그가 마음에 드나?', '이러이러한 단점을 참아낼 수 있을까?' 하는 계산적인 마음이 든다. 무엇보다 내가 상대를 마음에 들어할 때가 가장 기분이 이상하다. ’이 마음을 더 키워도 될까?’, ‘그는 나를 괜찮다고 생각할까?’,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일까?’, ‘사랑을 다시 할 수는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어느 쪽이든 희망찬 연애의 미래는 잘 그려지지 않았다.


혼자임을 받아들인다는 것

어느 날 지하철을 타기 위해 계단을 오르면서 평소처럼 핸드폰을 보며 머리 숙여 걷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쏟아지듯 계단을 내려오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 이제는 내 연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 진심으로 아끼고 끝없이 궁금해해 줄 이가 이제는 이 군중 속에 없다. 외로움보다도 이상한 안도감이, 왠지 모를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제야 비로소 오롯한 혼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힘들게 한 그의 나쁜 점들로부터 이제는 영원히 자유로워졌다는 것도 곱씹을수록 해방감이 드는 일 중 하나다. 거슬렸던 습관, 절대 바뀌지 않는 편견, 동의할 수 없었던 사고방식, 그의 모든 단점들을 이제 더 이상 끌어안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받아들여야 했던 그의 나쁜 점들은 이제 내 손을 영원히 떠났다.


물론 혼자가 되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다. 줄곧 혼자일 때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갑자기 혼자가 ‘되는’ 것은 적응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못된 관계 속에 머무르지 않고 괴롭더라도 스스로 걸어 나와 혼자 서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에 이상하고도 특별한 안심이 느껴졌다. 이 많은 사람 중에 어느 누구라도, 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 가능성 안에 내가 있다. 한 명에게 묶여있었던 지난 5년과는 아주 많이 달라진 기분이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도 상처 받는 이는 없다. 나의 고통을 함께 아파해줄 이 역시 없다. 자유로우면서 그만큼 외로웠다.



답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것

연애의 끝이 이토록 아프고 더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난 뒤 새롭게 연애를 시작하는 모든 이를 경외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떤 결말을 앞에 두었는지 알고나 사랑에 빠지는 걸까? 사랑에 빠진 뒤 겪을 괴로움을 알고나 소개팅에 나서는 걸까?


비혼주의자로서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모든 관계는 영원하지 않고 어떤 사랑도 절대적이지 않다. 연애를 시작하면서 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에 대해 자주 오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5년의 연애를 거치며 그런 생각들은 점점 희미해지고 관계 자체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줄면서 어쩌면, 혹시나, 이 사랑은 변치 않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던 것 같다. 어쩌면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평생, 또는 앞으로 몇십 년은 그와 함께 해도 좋지 않을까? 어쩌면 내가 함께 걸어갈 사람을 찾은 게 아닐까?


이별을 겪고 난 지금, '사랑에 영원은 없다'는 말을 뼈저리게 체험한 지금은 오히려 확신이 없어졌다. 사랑에 영원 말고 순간은 있을까? 내가 순간의 사랑도 없었던 관계에 너무 큰 의미 부여를 했던 것은 아닐까? 환상 속의 연애를 한 내가 과연 영원이 있다 없다를 논할 수는 있을까? 긴 연애를 하고 난 뒤 오히려 관계와 사랑에 대해 바보가 되어버린 기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실패할 사랑을 찾아 약속을 잡고 단장을 하고 기대감에 부풀어 서로를 만난다. 나를 영원히 살고 싶게 하기도, 오늘 당장 죽고 싶게 만들기도 하는 누군가를, 언젠가 내 마음을 부서뜨릴 수도 있을 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그 흔들리고 거대한 감정을 다시 한번 느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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