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28일째. 새로움 속에서 부르는 송가

슬픔이 잦아든 자리

by 하마

애인 찾는 어플을 깔아봤다. 사진들이 끝없이 나오면서 마음에 들면 스와이프를 하라는데, 어느 쪽으로 해야 한다고는 말을 안 해줬다. 그래서 마음대로 오른쪽 왼쪽 휙휙 넘기며 구경하다가 이상한 사람들에게 하트가 자꾸 눌려있는 것 같길래 그 하트를 취소하겠다고 또 꾹꾹 누르고 휙휙 넘기고. 알고 보니 스와이프를 반대로 하고 있었고 온갖 이상한 사람들에게 하트를 보내고 있었다. 덕분에 내 어플 피드는 취향과 완전히 반대인 사람들로 도떼기시장이 되어있었다.


그 카오스에서 깨달은 것은, 여기서 좋은 사람을 건지려면 하임달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 사진 몇 장과 다섯 단어의 소개글, 그리고 오직 그걸 보고 나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과 대화 몇 마디를 해보고 상대를 판단하는 건 불가능하다.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아무나 고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 소개팅 어플들을 체험해보다가 그나마 진중해 보이는 어플을 하나 찾았고, 거기에서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신뢰에 대한 불신

전 애인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연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그 어떤 사람보다 배경이 확실했다. 그의 부모님이 어떤 분들인지, 어디에 살다가 이사를 왔는지,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이었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알지 못했다. 공통 지인이 있다거나 확실한 인맥을 안다고 해서 상대가 믿을만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그 반증을 여실히 겪고 나니 더 이상 '확실한 인맥'에 대한 필요가 사라졌다. 누구든 직접 만나서 겪어봐야만 신뢰가 쌓인다. 그렇게 쌓인 신뢰도 완전히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신뢰라는 건 허상일지도 모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플에서 만난 사람을 어떻게 믿고 연애를 하는 거지?’ 싶었다. 이제는 어플이든 엄마 소개든 어떻게 만나느냐는 믿음과 상관없다는 생각이 든다. 믿을 만한 사람의 소개로 만나도 상대가 외도를 저지를 수 있고, 어플로 생판 모르는 남을 만나서도 깊은 사랑과 애정을 나눌 수 있다. 사람 일이란 절대 알 수 없다.


우스운 점은 이렇게 소개팅을 하기 시작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 시작할 때만큼 문화 콘텐츠를 많이 즐기는 때가 없다는 것이다. 일단 만나면 영화 한 편을 보기 일쑤고, 그러다 보면 서로 좋아하는 영화나 책,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좋은 밴드나 새로운 영화를 가장 활발하게 알게 되는 시기다. 오늘도 소개팅 상대와 서로 음악을 추천해주다가 ‘로로스’라는 밴드의 ‘송가’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다. 그 곡 하나를 들었다가 하루 종일 눈시울이 붉었다.


길었던 또 깊었던 우리의 시간은

천천히 처연히 멀어져 가고

열꽃처럼 피어있던

너의 흔적들도

어느새 조용히 모습을 감추었구나

(...)

멈출 줄 모르던 감정의 누수에

녹슬고 얼룩진 내 낡은 사랑이여

(...)

훗날 이 슬픔이 잦아든

여백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지금 흐르는 눈물이 마르면

무엇이 흐를까


-‘송가’, 로로스


노래 자체도 좋았지만 귀에 소곤소곤 불러주는 듯한 사운드 덕분에. ‘녹슬고 얼룩진 내 낡은 사랑이여’라는 대사 때문에. 지금 이 감정이 잦아든 자리에는 무엇이 깃들겠냐는 물음 덕분에. 하루 종일 이 노래 한 곡을 반복 재생하며 울컥거리는 마음을 달랬다.


여백을 채우기 위한 노력

내가 연애를 다시 시작할 준비가 되었는지 확신은 없다. 아직 내가 건재하고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해 타인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어플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인사를 하고 하는 일에 대해 가볍게 묻고 하루의 일과를 공유하기 시작하면서도, 내 마음을 줄 결심은 결코 없는지도 모른다. 소개팅에서 처음 얼굴을 마주했을 때 상대의 탐색하는 듯한 표정에 매번 상처를 입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눈에 그저 빠져들기만 했던 그와의 관계가 생각나서. 재고 따지는 과정 없이 그저 열렬히 서로를 원했던 5년이 떠올라서.


다들 연애를 시작하는 초반이 설레고 좋다고들 하지만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은 익숙하고 편안해진 오래된 관계다. 새로운 설렘을 원했다면 내가 먼저 그와 헤어지자고 했을 것이다. 오랜 연애를 끝내고 다시 새로운 연애를 시작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연애 초기의 푸릇푸릇함이 전혀 달갑지 않다. 나에게는 그 시기가, 안정되기 위해 넘어야 할 위태로운 강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만나고 있다. 열심히 탐색하고 인사를 하고 새로운 노래를 듣고 봤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슬픔이 잦아든 자리에 이 허무함을 딛고도 나를 알아줄 새로운 사람이 깃들지, 혹은 텅 빈 채로도 괜찮은 상태로 남게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과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움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송가를 부르고 있음에 위안을.


*표지 이미지 : stillness of w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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