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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아 Jan 20. 2022

통역사의 아웃핏(outfit)

06. 무채색 정장, 화려한 의상, 작업복에 안전모

보통 통역사 하면 떠오르는 시각적인 이미지는 무엇일까? 과거 나에게 통역사라는 직업은 시선을 끌지 않는 무채색의 정장(작업복)을 입은 채 노트와 펜을 들고 발화자와 가까운 위치에서 적고 말하기를 반복하는 사람을 떠오르게 했다. 행사나 회의의 주연이 아닌 조연. 그래서 잘 진행된 행사나 회의에서는 그 존재 자체가 잊히기도 하는... (통역 부스 안에 갇혀있는 경우도 많으니까)


그러나 현실 통역사인 나의 아웃핏은?!




행사나 통역 현장의 성격에 따라서 통역사의 의상은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다. 무채색의 정장이 어울리는 회의 현장, 화려한 의상이 어울리는 각종 연회, 작업복에 안전모 착용하고 기계에 오르고 내리며 통역하는 산업현장 등. 통역 현장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전 제공된 정보으로 현장을 상상해야 하기에 특별한 요청이 없는 경우 이전 경험을 바탕으로 대체적으로 무난하게 어우러질만한 의상을 선택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전 어느 지자체에서 주최한 국제 협의회에  참석한 해외 귀빈의 전담 수행통역을 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행사 기간 내내 꽉 찬 일정이 예정되어 있었고, 평소처럼 톤 다운된 비교적 활동성이 좋은 정장을 입고 행사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해 알게 된 그날의 오전 일정은 뉴스에 보도될 지자체 단체장과의 담화에서 순차 통역하는 것이었고, 오후에는 산업현장 시찰에 동행하는 일정이었다. 자체 당자를 만나 일정을 전달받은 후... 나는 급히 현장을 떠나 인근 백화점 의류매장을 찾아야 했다. 그 이유는 바로... 내가 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커트로 갈아입으면 좋겠다는 (동성의) 클라이언트의 명확한 요청은 상당히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히 내가 착용한 재킷과 어울리는 컬러의 스커트를 구매해 갈아입고 그날의 일정을 소화했다.


하지만 통역사로 소개된 나와 첫인사를 나눈 해외 귀빈은 나의 아웃핏을 보고서 아주 조심스레 본인의 의상이 한국의 예의에 어긋나는 것인지 물어왔다. 그들은 멋스러운 캐주얼 정장 차림이었기에... 급기야 산업현장 시찰에서는 외빈의 눈에는 활동에 제약에 있을법한 의상을 입은 통역사인 나를 줄곧 신경 써 배려하는 귀빈의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 펼쳐졌음에도 1주일에 가까웠던 긴 행사 기간의 마지막 날에서야 여성 통역사에게 바지가 허용되는 제한적 자유가 주어졌다.




지금은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에피소드의 하나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대한 당황스러움이 컸고, 앞으로 필드에서 적응해 나가야 할 부분이라고 나 스스로를 납득시켰던 기억이 있다. 형적인 상황도, 내가 바꿀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기에...


요즘 다양한 SNS를 통해 흔히 알려진 화려한 의상을 매번 갈아입고 행사에서 그 누구보다 돋보이는 통역사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이 일을 꿈꾸는 이들에게 본인의 경험 또한 신기하고 재밌는 현직자의 에피소드 중 하나로 전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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