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쭉 가자!

고마 쫌!

by 느닷

초등학교는 수업시간이 40분, 쉬는 시간 10분이다.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기에는 충분한 10분이지만 옆 건물에 있는 도서관까지 찾아가서 책을 고르고, 줄을 서서 대출과 반납을 하고 돌아오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10분이다. 나는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 2분 전부터 아이들을 열심히 교실로 돌려보낸다.


"자~ 종 치기 1분 전이예요. 어서 책 골라서 줄 서세요~ 대출 한 친구는 교실로 돌아갑시다 ~! 응? 연체라서 못 빌린다고? 그럼 다음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와서 읽으세요~ 응?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5권은 여기있어요~"


종이접기가 아직 안 끝난 아이, 읽던 책이 서너장 남은 아이, 숨은그림찾기를 다 못 찾은 아이, 재미난 책을 아직 못 찾은 아이. 모두 아쉬움을 남긴 채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수업 종이 울리면 바글바글하던 도서관에 잠시 정적이 깔린다. 그제야 책이 산더미같이 쌓인 책 수레 앞에서 한숨 돌리며 학부모 도서 도우미와 잠시 담소를 나눈다.

"아까 제로니모 5권 빌리려던 영준이요~ 제로니모 4권이 연체 반납되어서 못 빌려준다고 했더니 꼭 지금 읽고 싶다면서 속상해하더라고요~"

그때 어디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난다.

"크크크 크큭"

어라? 다급히 도서관 제일 구석에 있는 책상 의자를 꺼내고 안쪽을 확인했다. 지난주에 책상 아래에 숨어있던 영준이가 생각나서 들여다봤지만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곧 다시 의문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으흐흐흫”

고개를 내빼고 소리를 쫗아 도서관 끄트머리로 가니 안쪽 소파 옆 바닥에 납작 엎드려 제로니모 5권을 읽고 있는 4학년 영준이가 눈앞에 나타난다. 아이코! 또 너야~?! 영준이는 수시로 새로운 은신처를 만들어 내는 천재적인 녀석이다!

영준이는 수시로 숨을곳을 만들어내는 천재적 학생이다!


"야 이 녀석아! 얼른 교실 가자! 책 이리 주고~"

"아……. 싫어요오……. 조금만 더 읽을게요오~"

제로니모 5권을 든 영준이 손이 오른쪽으로 휙. 책을 뺏으려는 내 손도 오른쪽으로 획. 도망치는 영준이의 손이 다시 왼쪽으로 훅. 등짝스매싱에 실패한 내 손도 왼쪽으로 따라가며 휭. 내게 쫗기는 와중에도 다급히 책장을 한 장 넘기는 영준이.


"영준아 그냥 빌려줄게. 제발 교실로 가자~"

"으응……. 쪼끔만 더 읽고 갈게요오오~"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5권을 꼬옥 움켜쥔 영준이의 어깨를 밀며 신신당부를 한다.

"교실로 쭉 가! 쭉! 아! 걸으면서 읽으면 안 돼~ 제발 고마 쫌! 이대로 쭉 가자~"

'제로니모의 환상모험 '때문에 환장하겠다.


초등학교도서관에서 책을 제일 즐겨 읽는 학생은 1, 2학년이다. 3, 4학년이 되면 도서관 방문이 뜸해지기는 하지만 아직 책을 싫어한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다 5학년이 되면 (특히 남학생들의 경우) 대부분 독서라면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도서관과 인연을 끊어버린다. 영준이처럼 책을 좋아하던 학생들도 5학년이 되면 거짓말처럼 책을 멀리한다. 사실 이 부분이 더 환장할 노릇이다.


왕년에 단골이었던 고학년 이용객들을 복도에서 마주치면 나는 요즘 왜 도서관에 안 오냐며 놀러 좀 오라고 안부를 묻곤 한다. 아이들의 이유는 다양한데 표현은 간단하다.

“너무 바빠서요.”

학원 시간이 빠듯해서, 친구랑 놀 시간도 부족해서, 이따 논술학원에 가면 또 읽어야 해서, 게임 하느라 바빠서, 숙제가 많아서 너무 바쁘다고 말하는 얼굴에 ‘책 너무 싫어요.’라고 씌어있다. 누가, 무엇이 이 아이들을 책과 이간질한 것일까? 독서록, 독후감, 독서논술, 전집, 필독서, 수준에 안 맞는 어려운 책, 게임, 스마트폰. 의심 가는 범인이 제법 있긴 한데 아직 물증이 없다.


책을 즐기는 영준이의 시간을 성인이 될 때까지 쭉 지켜주고 싶다. 그런데 혹시 나도 독서에 흥미를 떨어트리는 범인 중 한 명은 아니었나? 새삼 자기검열을 하며 도서관 프로그램을 다시 찬찬히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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