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사서, 캐스팅: 학생, 촬영: 학교도서관
코로나로 도서관이 휑하던 여름을 틈타 개명을 했다. 개명이라는 행위에는 지난한 시간 어지러웠던 개인사를 정리하고 싶은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격하게 촌스럽기도 했던 이름을 버리고 여러모로 좋은 의미를 담은 이름을 공들여 골랐다. 더운 계절이라 전 교직원에게 아이스크림을 돌리며 새로운 이름으로 불러주십사 인사했다. 주변 지인들에게도 개명한 이름을 널리 알렸다.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많은 분이 부러 자주 불러주신 덕분에 금세 새 이름에 익숙해졌다.
"음~ 전에 이름이 훨씬 친근하고 좋던데 왜 바꿨대? 영~ 익숙지가 않아서 말이야…. 난 그냥 옛날 이름으로 부를게~"
한 지인이 유독 고집스레 개명 전 이름으로 나를 다정스레 불렀다. '개명'이라는 번잡한 법적 절차를 거쳐서까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서 하는 본인의 의사를 깡그리 무시하는 지인의 태도에 몹시 기분이 상했다. 나는 그 웃는 얼굴에 침을 뱉듯 성질머리를 까발렸다.
상대가 원하는 이름으로 상대방을 불러주는 것은 존중의 첫 단추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도서관에 오는 아이들이 이름 외에 따로 원하는 캐릭터가 있으면 그것도 인정해 주려고 애쓰는 편이다.
부캐는 꿈꾸는 아이들의 특권이다. 초등학교도서관에는 꿈꾸는 듯한 눈을 가진 아이들이 종종 있다. 3학년 내내 커다란 토끼 머리띠를 하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4학년이 되어 만났을 때 디자인이 조금 소박해졌을 뿐 아직도 작은 머리 위에 얹힌 토끼 머리띠를 보며 그 아이를 '토끼야~'라고 불러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이는 완벽히 흡족해했고, 나는 토끼에 대해 자세히 설명된 자연관찰 책과 동물도감을 대출해 주었다.
지난달에는 파브르 곤충학자가 썼을 법한 갈색 탐험가 모자를 한 달 내내 눌러쓰고 다니는 아이가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곤충과 공룡책 영업을 좀 하다가 실패했다. 모자가 알려준 선입견과는 전혀 다르게 무척 내성적이고 정적인 아이였었다!
오늘은 무엇에 필이 꽂혔는지 6학년 도서부 중에 한 아이가 두 팔을 좌우로 뻗어 물결치듯 흐느적거리며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을 게걸음으로 들락거렸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주문인지 노래인지 아리송한 문장을 계속 읊조린다.
"마이네임 이즈 호빵매앤~~~, 마이네임 이즈 호빵매애앤~~~~, 선생님! 저 마이네임 이즈 호빵맨이에요~"
우리 영채가 어쩌다가 이런 요상한 것이 되었는지! 호빵맨은 장르가 어떻게 되는지 도통 감이 안 온다. 내일도 여전히 호빵맨으로 나타나면 진지하게 해당 장르를 고민해 봐야겠다. 요리? 애니메이션? 댄스? 영어? 어디로 관심이 뻗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호빵맨’이라고는 불러줄테다.
1, 2교시 블록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20분 쉬는 시간에 최선을 다해 '즐거울 궁리'를 한다. 기특하게 구석진 도서관까지 찾아오는 아이들도 제법 있다. 물론 '즐거울 궁리'끝에 선택한 곳에서 쓰는 귀한 시간인 만큼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란스러움은 애교로 봐줘야 한다.
애써 틀어놓은 클래식 음악이 도통 들리지 않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도서관의 한가운데 처음 보는 1학년 아이가 홀로 서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직 도서관이 낯설어 그런가 싶어 말을 건넸다.
"왜 혼자 그러고 있어~? 뭐 도와줄까요?"
"괜찮아요~ 저는 지금 친구들의 말을 모으고 있거든요."
세상 모든 아이는 시인이라더니! 오랜만에 꿈꾸는 꼬마 시인을 발견하는 순간이다.
"와~ 멋지다! 너처럼 가만히 눈 감고 서서 햇살도 모으고 색깔도 모으는 '프레드릭'이라는 생쥐 이야기가 있거든~ 널 보니까 그 책이 생각나네!"
"그런 생쥐가 있어요!? 저 그 책 보고 싶어요!"
꼬마 시인은 세상 행복한 얼굴로 '프레드릭 / 레오 리오니 / 시공주니어 '책을 끌어안았고, 나는 대출 영업에 성공했다. 일주일 뒤 1학년 꼬마 시인이 햇살을 그러모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그림책을 반납하러 왔다. 나를 얼마나 봤다고 오른손을 힘차게 흔들며 아는 체를 한다.
"선생님~ 프레드릭 왔어요~!"
"그래~ 프레드릭 어서 와~ 참! 그림책을 쓴 '레오 리오니' 작가가 그 다음에 쓴 책은 뭔지 아니?"
우리 꼬마 시인은 잠시 당황하더니 어서 어서 그 책을 찾아 달라고 재촉했다. 꼬마 시인은 '아주 특이한 알 / 레오 리오니 / 시공주니어' 책을 대출하기 위해 대출 데스크에 줄을 섰다. 2차 영업도 성공! 도서대출을 위해서는 아이의 이름을 대출화면에 입력해야 한다.
"이름이 뭐예요?"
"선생님 저예요~ 저! 1학년 4반 프레드릭!"
아이코. 우리 꼬마 시인이 프레드릭으로 완벽히 빙의되었다! 그래. 내 너를 프레드릭이라 불러주마. 옆에서 같은 반 친구들이 키득키득 대신 이름을 말하며 나를 도와준다.
나는 그 뒤로도 한동안 점심시간이면 프레드릭과 인사를 나눴다. 내가 프레드릭 어서 와~ 인사를 건네면 꼬마 시인은 쪼르르 달려와 작은 두 팔로 내 허리춤을 감싸 안으며 퐁! 안겼다. 그런 순간엔 지친 마음이 부풀어 올라 잠시 둥실 떠오른다. 이번 캐스팅은 성공적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