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쉬는 시간, 점심시간의 교실과 복도는 아이들에게 사회생활의 데뷔무대 같은 곳이다. 누구에게 아는 체를 해 볼까, 누가 내게 말을 걸어올까,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누구와 운동장으로 나갈까 등등. 혼자든 같이든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시간이다. 가끔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두려움과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느끼는 아이들도 있다. 그 시간이 곤혹스러운 아이들은 홀로 화장실, 보건실, 상담실, 도서실을 하릴없이 방황한다. 수업 시간과 달리 의자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너무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 '방황하는 어린양' 대표주자들이 가장 쉽게 둥지를 트는 곳이 도서관이다. 도서관에서는 혼자 앉아 있어도, 홀로 서 있어도 손에 책만 한권 쥐고 있으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작년의 어린양들은 치유되어 떠나기도 하고 올해 다시 쓸쓸한 얼굴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학기마다 새 멤버가 어김없이 추가된다. 이들의 명단은 보건, 상담, 사서가 굳이 공유할 필요도 없이 항상 정보가 일치하는 신기한 명단이다
가영이는 옆머리가 한쪽 눈을 다 가리고 있어서 그런지 늘 고개를 삐딱이 하고 도서관을 들어서는 아이다. 나는 누구든 도서관 문턱을 넘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환영 인사를 한다. 대부분은 "안녕하세요"를 대충 답하고 자기 볼일을 보기 바쁘지만 가영이는 방황하는 어린양답게 대답없이 도서관을 서성였다. 이 녀석이 내 책상 옆 앉은뱅이 의자의 특별 게스트가 된지 벌써 두달이 지났다. 쉬는 시간이 아무리 대출 반납으로 바빠도 나는 굳~이 가영이를 특별석에 불러다 앉힌다. 손빗으로 머리를 쓱쓱 빗긴 다음 눈을 가리고 있던 머리를 뒤로 묶어줬다. 아들 밖에 키워본 적 없는 티가 팍팍 나는 어설픈 솜씨다. 가영이는 마음에 안 드는지 금세 노란 고무줄을 풀어버리곤 했지만 나는 머리 묶어준 품을 받는 요량으로 굳~이 가영이에게 심부름을 시키곤 한다. 종이 쓰레기를 버리고 와라, 잡지를 월별 순서대로 좀 꼽아 달라, 연필을 깎아 달라... 귀찮다고 하면서도 가영이는 어슬렁 어슬렁 심부름을 했다. 너무 대충해서 되려 내 일이 늘어나는 수도 있었지만 여하튼 나는 격한 어조로 "고오~마워!'를 연발하며 비타민 하나를 손에 쥐여 보냈다. 나는 누구든 도서관을 문을 나서는 사람에게 배웅의 말과 함께 다음을 기약한다. "잘가~ 내일 또 오와~"
가영이의 쉬는 시간이 그렇게 두어달 무사히 지나갈 때 쯤. 가영이는 여전히 한쪽 눈을 가린 채 고개를 삐딱이 하고 다녔지만 도서관에 들어서면 내게 먼저 다가왔다. "선생님 심부름 할 거 없어요? 심심해요~ 뭐 재미있는 거 없어요?" 드디어 준비가 된 것이다. 나는 도서관의 다른 어린 양들과의 미팅을 주선했다. 학년은 굳이 같을 필요 없지만 성별은 같은 편이 좋다. 아, 1학년은 성별이 달라도 결과가 좋은 편이다. "저~기 하정이가 실뜨기 놀이 같이 할 사람이 없다고 하던데 가서 한 번만 같이 해주면 어떨까?" 가영이는 슬쩌기 쳐다보더니 "실뜨기할 줄 몰라요"라며 거절했다. 실패다. 그래도 기회는 많으니 걱정 없다. 큐브, 미로찾기, 종이접기, 글똥누기 등 다양한 치트키를 도서관 곳곳에 널어놓았기에 미팅 성공률은 좋은 편이다.
햇살 좋은 어느 점심시간. "가영아 국어사전 좀 3-1 교실에 가져다줄래? 10권이라 무거우니까 소정이랑 나눠 들고 갔다 오자~" 심부름 미팅을 주선했는데 국어사전 배달이 잘 되었는지 어쨌는지 요 녀석들 비타민 받으러도 안 오고 사라졌다. 그러고는 다음날 점심시간에 둘이 나란히 도서관을 들어서는 게 아닌가! 미팅 성공이다. 그렇게 가영이랑 소정이는 도서관에서 쉬는 시간을 좀 보내는가 싶더니 도서관에 발길을 뚝 끊었다. 방황하는 어린양 둘이 줄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어린양들은 아무리 도서관에 자주 와도 나의 도서대출 실적 향상에 도움을 준 적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