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제일 도서부

| 학교도서관이 가진 의외의 기능

by 느닷

지난 3월. 그동안 코로나 때문에 학생들의 발길이 뚝 끊긴 도서관에 드디어 아이들이 돌아왔다.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의 흥미를 끌기 위해 실뜨기 책과 큐브 책. 그리고 실뜨기 실과 큐브를 몇 개를 사서 새로 비치했다. 그런데 조심성 없는 저학년들이 딱딱한 바닥에 큐브를 떨어트리기 일쑤였고 알을 억지로 잡아빼고 돌리니 고장이 잘 났다. 큐브의 원리를 전혀 모르는 나는 정말 골치가 아팠다. 게다가 실뜨기 실은 매일 엉켜있었다. 저걸 싹 없애버려야겠다며 애증의 콧김을 뿜어대는 내 모습을 보고 6학년 지영이가 내게 작은 드라이브를 달라고 했다. 자기가 어쩌면 고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설마…. 사실 믿지 않았지만 지영이가 무안할까봐 드라이브를 건넸다. 한참을 낑낑 대더니 점심시간이 끝나도록 못 고쳤다. 미안하다며 방과 후에 다시 오겠다고 한다. 아니 뭐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되는데…. 뭐 편한대로 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 녀석 진짜 수업이 끝나자마자 쌩하니 오더니 30분을 더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고쳐냈다!


"와! 너 천재 공학도였구나!"

나는 진심으로 감동해서 외쳤다. 천재 공학도는 그날부터 쉬는 시간마다 자발적으로 와서 실뜨기와 큐브 바구니를 관리했다. 이제 큐브 수리에는 달인이 되었다. 책 읽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지영이의 도서관 자부심은 대단하다. 틈틈이 큐브 실력을 뽐내며 저학년들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실뜨기 실이 꼬이면 꼼꼼히 풀어주는 것도 천재공학도의 몫이 되었다. 나는 천재 공학도를 믿고 올여름에 비싼 자석 큐브를 추가로 들였다. 고오급 큐브가 있다는 소문에 생전 도서관 문턱도 안 밟던 고학년 아이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우리의 천재 공학도는 졸업을 앞두고 5학년 도서부에게 큐브 수리기술을 전수했고 어느새 학교 도서관 큐브팀의 리더가 되었다.


도서관에는 홍보팀도 있다. 도서관에 이벤트가 있을 때마다 배너와 포스터를 만들어 홍보를 하는데 내가 인쇄한 배너보다 아이들이 손으로 만든 포스터가 훨씬 학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도서부에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몇 명에게 부탁을 했었다. 쉬는 시간마다 틈틈이 그리다 보니 작업이 더뎠다. 그때 구경하던 고학년들이 같이 하고 싶다고 했다. 같이 하니 속도도 빠르고 포스터도 다양하게 나왔다. 그리고 같이 그림을 그린 아이들을 통해 자연스레 행사 홍보도 잘 되었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다음 포스터는 언제 그리냐며 도서관 이벤트 일정을 챙기기 시작했고 어느새 홍보팀이 되었다. 홍보팀의 정확한 인원수는 알 수 없다. 학교가 조용할 땐 늘었다가 학교에 다른 재미있는 일이 많으면 줄어든다. 대형 포스터를 그리거나 포스터를 여러 장 그려야 할 때는 책 빌리러 온 친구들을 몇 명 더 홍보팀으로 포섭해서 작품을 완성한다.


이번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초대형 크리스마스 포스터를 그릴 때는 구경하던 저학년들이 유난히 부러워했다. 멋진 스케치를 하며 그림 실력을 마음껏 뽐내던 6학년 중 한 녀석이 저학년에게 색칠을 허락했다. 퀄리티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속상해하는 동급생들을 다독이며 1, 2학년에게 파스텔과 반짝이 풀 사용법을 가르치는 모습이 미술 선생님 못지않았다.

어쩌다 보니 무려 1~6학년이 모두 참여한 포스터가 완성되었다. 열흘 동안 짬짬이 그린 결과물은 의외로 굉장했다. 완성된 그림을 보며 저학년들은 더없이 뿌듯해 했다. 고학년들은 저학년들과 소통하며 색다른 보람을 느꼈는지 부쩍 선배 티를 냈다. 나는 홍보팀에게 사탕을 한 움큼씩 쥐여주며 너희가 얼마나 멋있는지 말해줬다.


요즘은 글똥누기 팀이 생겨나고 있다. 내가 방과 후에 도서관 방문자가 줄어드는 것 같다며 며칠 고민 했더니 서은이가 포스트잇을 좀 달라며 가져갔다. 다음날부터 아이들이 비밀 미션을 수행하러 왔다면서 ‘글똥누기 하면 비타민을 드립니다!’라고 적힌 포스트잇을 한 장씩 들이밀었다. 서은이가 글똥누기 이벤트를 기획해서 홀로 시행한 것이다! 사실 글똥누기는 상시 행사이지만 모르는 학생이 많은데 그걸 비밀 미션이라며 홍보를 한 것이다. 서은이는 요즘 쉬는 시간마다 '최고예요' 도장과 비타민을 들고 다니며 글똥누기 코칭을 하고 있다. 비밀 미션의 내용에 실망한 친구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지 않고 꿋꿋이 그림책을 읽히며 글똥누기 한 장 쓰고 가라고 설득하는 모습이 놀라울 따름이다. 나는 아예 비타민을 통채로 맏겼다. 그리고 아이들이 적어내는 글을 도서관 앞에 촘촘히 전시했다. 조만간 비밀 미션에 동조하는 무리가 생겨날 것 같은 조짐이 느껴진다.


도서관에 이렇게 에너지가 넘치는 아이들만 있는것은 아니다. 도서관은 그 반대의 학생들이 더 눈에 띄는 곳이다. 4학년 동희는 올해 5월부터 점심시간마다 일등으로 도서관에 와서 내 옆자리 보조 의자를 차지했다. 이 녀석은 울적한 얼굴로 짜부라져 있다가 말없이 사라지는 학교 대표 불편러였다. 세상만사 싫은 것 투성이라면서 도서관에는 어떻게 꼬박꼬박 오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2학기가 되어도 한치의 변함없이 시무룩하게 내 눈치만 보다가 다른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우르르 몰려들면 도망치듯 사라져 버리는 동희가 늘 안쓰러웠다. 긍정 에너지를 무한 발사하는 것 말고는 딱히 해줄 것이 없기에 나는 모르는 척 매번 똑같이 안부를 묻고 안색을 살폈다. 돌아오는 대답은 늘 비슷했다. 속상해요, 재미가 없어요, 억울해요, 힘들어요, 지루해요, 책 싫어요, 그런 거 관심 없어요, 전 못생겼어요…. 컨디션 안 좋은 날에는 가끔 저 먹구름에 나도 휘말릴 지경이다.


그러다 며칠 전. 학부모 도서 도우미도 없는 와중에 1학년들로 붐벼서 유난히 정신없던 날이었다. 1학년들은 도통 눈치가 없다. 대출반납 줄이 아무리 길어도 종이접기책을 찾아달라는 둥, 추천도서를 골라 달라는 둥 사서 찬스를 거침없이 남발한다. 그날도 동희는 보조 의자에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림자 같이 꼼짝 않던 동희가 내가 책 찾으러 간 사이에 내 자리에서 대출반납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동희는 내가 하던 말투도 고대로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일주일 연체되었네요? 무슨 일 있었어요? 코로나? 그럼 연체 풀어줄게요~ 다음엔 날짜 꼭 지켜주세요~”

“다음 주 수요일까지 반납이구요, 나머지 한 권은 내일까지 반납이에요~.”

"연장은 한 번만 가능합니다."

캬…. 완벽하다! 어디서 저런 능숙함이 불쑥 튀어나왔을까?

나는 양손을 높이 들어 동희에게 격한 엄지 척!을 날리고 다시 1학년들의 책을 찾아주러 서가로 뛰어갔다.


그날 동희는 보조의자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감사의 선물로 건넨 꼬마 약과를 두 손과 함께 주머니에 찔러 넣고 괜스레 건들거리며 아이들 사이를 기웃거렸다.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처음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동희는 오늘 자기가 한 행동이 제법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물론 대출 반납 도우미 노릇이야 호기심에 몇 번 하다 말겠지만 동희가 경험한 작은 즐거움은 동희의 자존감을 1레벨 올려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줄 뿐 대단히 뭘 계획해서 해라 마라 시킨 적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쉬는 시간만 되면 도서관에 자동시스템이 장착된 것 처럼 각자가 원하는 다양한 활동을 즐기는 풍경이 자주 펼쳐진다. 스스로 뭔가를 찾아내서 해 내며 스스로 자신감을 드높이는 신기한 모습을 볼 때 마다 나는 아이들 앞에서 겸허해진다. 독서 이외의 목적으로 이렇게 도서관을 제 집 드나들 듯이 방문하는 아이들과 동아리 활동을 겸하는 아이들을 모두 합쳐서 나는 ‘도서부’라고 부른다. 사랑스러운 도서부의 인원은 유행처럼 늘어났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지만 늘 존재하며 주도적 에너지를 뿜어낸다. 학교 도서관은 이런일이 무시로 일어나는 곳이다. 사서는 아이들이 도서관에서 스스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자극하고 북돋아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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