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페잇퍼

The Secret

by 미하

비밀 책방.

버스정류장에 내리자 저 앞에 있는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켜진다. 부리나케 달려 왕복 1차선 도로를 건넌다. 뜀박질이 꽤 가볍다.

너와는 왕복 몇 차선의 거리쯤을 떨어져 있는 걸까. 사이를 가르는 길. 냅다 달려 순식간에 건너버리고 싶다. 나는 아직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파란불이 켜질까. 고장 난 신호등일까. 길을 건널 수 있을까?


편의점에 들러 작은 초코바를 하나 산다. 입에 넣지도 않았는데 이미 기분이 조금은 들떠 버렸다.

주머니 속 초코바를 기분 좋게 만지작거리며 골목을 돈다. 안쪽에 paperr 간판이 붙은 작은 3층 건물이 보인다.


페잇퍼는 비밀 책방이라 불린다. 현관이 잠겨있고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들어갈 수 있다. 페잇퍼 홈페이지에서 오늘의 비밀번호를 확인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버튼을 누른다. 이게 뭐라고 조금 흥분한 탓에 직원용 출근 버튼을 눌러버렸다. 다시 정신을 차린다. 안쪽에서 손님 하나가 나오지 않고 버퍼링 걸린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내가 비밀번호를 누를 수 있게 배려해 준 느낌이다. 이 순간의 즐거움이 매우 크다. 비밀번호를 제대로 입력하니 문이 열리고 고마운 분은 떠나간다.

발을 살짝 들여놓는다.

너의 비밀번호는 어디에 적혀있을까. 알려는 줄까. 나는 너라는 아지트에 입장할 수 있을까?


페잇퍼의 대장 냥이 대길이가 안쪽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나를 관찰하고 있다. 이 녀석,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높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 가까이서 보니 눈이 참 예쁘다. 사진보다 실물이 낫다. 조심스레 손을 뻗어 다가가니 먼저 비비적댄다. 개냥이다. 귀여움이 증폭된다.

너의 눈은 강아지를 닮았다. 나는 고양이보다 강아지를 좋아한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고양이 대길이가 강아지 같은 너보다 귀엽다. 넌 마냥 귀엽지만은 않으니까. 가끔 어쩔 수 없이 많이 미우니까. 고양이 같은 강아지보다는 강아지 같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걸 지각하는 순간, 그럼에도 네가 보고 싶다.


체크인 후에 커피를 들고 그림책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간다. 전기난로 옆에 딱 붙어 고른 책들을 읽는다. 이곳은 천장이 낮은 작은 공간인데 계단도 많아서 마치 다락방 같다. 3층은 더 그렇다.

여러 개의 그림책을 빠르게 훑는다. <워터보이>라는 두꺼운 그림책이 꽤 좋았다.


만화책이 있는 공간으로 자리를 옮겨 탐독할 준비를 한다. 재밌는 걸 고를 수 있을까. 내 취향의 만화가 나타날까.

너는 만화책을 좋아할까. 나는 아주 많이 좋아한다. 안 본 지 오래되었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때 그대로.

너를 안 보게 되어도 마찬가지겠지. 나는 좀처럼 변하지 않겠지.


이상하다. 만화책이 눈에,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만화책을 보는 시간보다 서가 앞을 서성거리는

시간이 더 많다. 책이 아니라 서가를 읽고 있다. 마감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갈 때쯤 마지막으로 몇 권을 빼내 든다. 테이블에 늘어놓고 빠르게 훑는다. 그러다 한 만화책의 내레이션에 시선이 멈춘다.


[그녀는 고백 한 번 없이… 그렇게 떠나간 사람…]


이렇게 되는 걸까? 나는 너를... 떠나갈까.

이 만화를 완독해야 하는 이유가 생겨버렸다. 주인공은 용감할까?



**

<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the Other (by Lauv)

**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