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부신
<빛 : 영국 테이트 미술관 특별전>
어제, 선착순 15명에 들지 못해 도슨트를 통한 특별전 관람은 오늘로 미뤄졌다. 다만 오늘, 성공한다면.
“소용없어요. 15명 다 찼어요.”
눈에 보이는 줄의 인원은 열 명 남짓인데? 일단 포기하지 않고 대기를 선택한다.
시간이 거의 다 되어 미술관 관계자들이 정리를 위해 다가오자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나 줄 사이로 끼어든다. 내 앞에 다시 선 사람들의 수를 세어보니 열넷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심하고 있는데 관계자가 내게 말한다.
“죄송하지만 열다섯 명이 다 차서요. 다음에 이용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앞에 열네 명인 데요?”
“아까 인원 점검을 했을 때 마지막 열다섯 분까지 다 채워졌습니다.”
어쩐지 억울해져 항변을 한다. 뭔가 정의롭지 않다.
“지금 서 있지 않으면 소용없는 것 아닌가요?”
안타까움을 좀 전할 요량으로 어제도 왔었다가 돌아갔다는 말을 덧붙인다.
너에게는 털어내지도 못하는 똑 부러지는 말을 웬일로 참 잘도 한다.
도슨트는 가만 듣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말씀을 들어보니 일리가 있으셔서요. 알겠습니다.”
오디오 기기 대여지에 이름을 적고 신분증을 맡기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내 앞에 먼저 와있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게 나는 정정당당한 열다섯 번째 도슨트 관람객이 된다. 기다림을 선택했고 정당하게 항의했고 이의는 받아들여졌다.
너와 나 사이에는 기다림의 시간이 한쪽으로만 흐른다. 관계의 결론을 짐작할 수 없다. 마음은 선착순이 아닌데 어쩔 수가 없다. 시작 시간도 마감 시간도 모르는, 언제 끝내야 할지도 모르겠는 마음의 대기줄에 마냥 서 있다.
선착순으로 너의 마음에 들 수는 없겠지만, 기다리다 보면 어떻게 너를 봐야 하는지 도슨트의 안내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 도슨트가 바로 너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너 자신에 대해 말하는 순간의 네가 좋다.
모네, 칸딘스키처럼 매우 유명한 작가의 작품도 있고 잘 몰랐던 작가들의 작품도 있다. 약 200년, 43명의 작가, 110점의 작품 중 클로드 모네의 <엡트 강가의 포플러>는 500억 원의 최고 보험평가액을 책정받았다는 설명을 듣는다. 관람객들의 탄성이 터져 나온다.
[1. 빛, 신의 창조물]에서 [16. 빛, 인간의 창조물]까지 도슨트를 잘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듣고 메모를 한다.
도슨트 관람은 약 50여 분이 소요되었다.
도슨트 관람객에게는 재입장이 허락되었다. 다시 혼자 관람을 한다. 한국인들에게 유난히 더 인기가 있다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이 걸린 [4. 빛의 인상] 전시실에선 나도 한참을 머물렀다.
존 브렛과 클로드 모네의 작품 앞에 꽤 오래 멈춰 서서 도싯셔 해변, 엡트 강가, 센 강에 너를 차례로 세워두고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받고 선 너를 그려본다.
- <무제>, 보험가액을 산출하지 않음.
모든 작품의 액자에는 어쩔 수 없이 작품 보호를 위한 유리가 끼워져 있다. 각 세션에는 안전 요원들이 배치되어 있다. 페이 화이트의 <매달려 있는 조각>에서는 작품에 취한 한 사람이 무심코 손을 뻗고 조각에 다가가다 낮게 쳐놓은 줄에 다리가 걸린다. 안전 요원이 제지를 한다.
“만지시면 안 됩니다.”
너에게 가까이 가고 싶지만 닿을 수 없다. 유리를 걷어내고 금단의 경계를 넘고 싶지만 허락되지 않는다. 눈으로만 너를 담는다.
미술관 관람을 마치고 1층 CAFE SeMA에 들른다. 아인슈페너 맛이 꽤 훌륭하다.
입가에 묻은 크림을 닦아내며 너의 크림 묻은 얼굴을 멋대로 상상한다. Drama처럼.
미술관 외형은 노원 지명의 어원을 따 갈대 언덕처럼 꾸며놓았다. 건물 전체가 흙과 풀로 덮인 동산처럼 보인다. 특별전 주제처럼 빛이 부서져 내려 눈이 맵다.
바로 바라본 대가로 눈에 물방울이 고였다 터진다.
건물 위와 둘레에 조성된 산책길을 걷는다. 걷는 동안 빛에 반짝이는 풀이 갈대가 아니라 키 큰 강아지풀인 것을 깨닫는다. 늘 지나치기만 했던 북서울 미술관의 비밀을 이렇게 하나 알게 된다.
너로 인해.
**
<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그림 (by Aden(에이든), 정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