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os
언덕을 다시 내려간다. 길을 잘못 들었다. 순간적으로 온 직감을 따라 발을 멈추고 방향을 튼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국립기상박물관은 이 언덕 동네에서도 제일 꼭대기에 있다. 하마터면 길고 긴 언덕길을 ‘더 길게’ 다시 오를 뻔했다.
직감은 매우 자주 들어맞는다. 하지만 너에 대한 직감은 항상 의심한다. 사람들은 상처받고 싶지 않은 이유로 많은 것을 믿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그리고 사실, 그것이 직감인지 그저 깊은 기대가 투영된 스스로에 대한 주문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믿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또 제멋대로 떠오른 너에 대한 직감적 이미지들을, 어떤 장면들을 머릿속에 그냥 내버려 둔다. 애써 몰아내지 않는다.
날씨처럼 정말 변덕스럽기 짝이 없다.
다시 제대로 언덕을 오른다. 다 올라왔나 싶을 때쯤 몇 미터 더 가라는 간판이 보이고 언덕이 또 나오는 게 반복된다. 해설 시간에 늦지 않으려 종종거린 탓에 숨이 더 가쁘다. 오랜 짝사랑의 트랙을 돌고 있다.
도착하니 안내데스크 옆 정수기부터 눈에 띈다. 코로나 시국이라 물을 제공하지 않는 곳이 태반인데 이곳은 예외다. 물을 주지 않으면 박물관 현관 앞이 숨넘어가는 사람들로 즐비할지도 모른다. 숨을 진정시키는데 물이 세 컵 들었다.
기상 관측의 역사, 유물, 일기 예보 등에 대한 해설사의 설명을 꼼꼼히 듣는다. 그리고 혼자서도 다시 한번 천천히 구석구석 둘러본다.
바람 소리를 관측했던 동그란 방 소파에 기대 천장을 바라보며 큰 숨을 내쉰다. 바람 소리에 한숨이 묻혀 사라진다.
계단 옆 복도 벽에 붙은 기상학 연표를 훑어본다.
‘로렌츠의 카오스 이론’? 꽤 궁금해서 검색을 한다. 아하! 이거였구나.
- 아주 미세한 변화가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나는 무얼 변화시켜야 하는 걸까. 수없이 접으려 했던 마음은 너무 큰 입력값이다. 미세한 것이, 사소한 것이 필요하다.
앞마당으로 나가 ‘서울에 첫 벚꽃이 피었다’라든지 ‘서울에 첫 단풍이 들었다’ 할 때 기준이 되는 계절관측목 벚나무와 단풍나무도 본다.
꽤 시니컬한 네 마음속에도 이런 표준목 하나 들여놓고 싶다. 나의 첫 벚꽃, 첫 단풍은 오래전 피고 물들어 지금은 낙화와 낙엽을 걱정할 지경이 되었는데 너는, 다른 일기 속에 산다.
너와 나, 기분 관측의 역사도 계속되고 있다. 박물관에서 기념품으로 준 일기도와 볼펜이 있는데 나는 그 일기도에 희한한 걸 그려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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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나비효과 (by 볼빨간사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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