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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사박물관

문턱

by 미하

생각보다 늦게 눈을 떴다. 생활사박물관에 가려고 알맞은 시간으로 설정해 둔 알람 시계가 고장 난 탓이다.

갈까, 말까. 비단 집순이의 게으른 마음 때문만은 아니다. 좀 일찍 가서 여유롭게 둘러보고 싶었는데 시간이 애매하다. 하지만 너를 여행하는 날이라고 늦지는 않게 눈이 떠졌으니 역시, 방구석을 뛰쳐나가야겠다. 그 마음이 이 서울여행의 시작이었으니까.


대충 나갈 채비를 하고 집을 금방 나선다. 그리고 생활사박물관을 향해 빠르게 걷는다. 집에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는 생활사박물관은 항상 지나치기만 하고 한 번을 둘러보지 못했던 곳이다. 이곳을 오늘 방문한다. 이제는 모든 곳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모든 곳에 네가 있기에.


이곳에는 예전에 서울북부지방법원 청사가 있었다. 북부 지원이 도봉구 창동으로 이전한 후 오랜 시간 비워져 있다가 서울생활사박물관과 서울여성공예센터 등이 자리 잡았다.

계단을 오르는데 어쩐지 매우 고요한 느낌이 든다. 옛 북부 지원의 느낌이 채 가시지 않은 듯하다.


입구를 찾아 안으로 들어서니 방문객 팔찌가 놓여있다. 스스로 하는 시스템. 꽤 흥미롭다. 어렵사리 혼자 팔찌를 차고 1층부터 둘러보기 시작한다.


4층 서울멋쟁이 특별전시까지 그야말로 서울의 일반적/대중적 생활사가 펼쳐진다.

내 생활은 네 덕분에 한껏 더 엉망이 되었지만, 이곳 서울생활사박물관은 무척 잘 정돈되어 있다.

정돈감 같은 건 좀 옮아와도 좋으련만.


서울토박이에 대한 설명 보드를 읽는다.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서울토박이에는 해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생활사에서 정의하는 서울토박이는 1910년 이전부터 한성부에서 살고 있었던 한양사람의 후손들로 3대 이상 거주해 온 사람들이라고 한다. 대신 서울로 유입된 인구와 서울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부여된 명칭은 서울사람, 서울내기였다.

파리지엔느, 뉴요커처럼 서울사람, 서울내기들도 독특한 서울의 문화를 이루며 생활하고 있다는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너는 토박이일까? 서울내기일까? 너의 살던 고향은 어디야?


읽다 보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여간내기, 서울깍쟁이.

나는 여간내기이고(아마도) 깍쟁이는 아니다(역시 아마도). 하지만 너는. 나에게 있어 몹시 어려운 너는. 여간내기가 아니다. 너는 자신을 평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이 역시 아마도).

이 말이 이렇게나 상대적인 말이었던가? 깍쟁이란 말도 마찬가지다. 깍쟁이가 되어 너를 휘둘러보고도 싶다. 그게 쉽게 스위치 될 수 있는 것이라면.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지 않는다. 나는 바보이지만 그런 바보는 아니다.


서울내기들의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생활사를 다루고 있다 보니 서울가족의 탄생/결혼/신혼여행/출산/육아 등에 대한 전시코너가 상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과는 퍽 다른, 조금은 이질적인 느낌 속에서 부러운 마음 반 공부하는 마음 반으로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다가 보성문구사 코너에서 반가운 물건들을 마주한다. 못난이 삼 형제와 같은 재질,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어진 고무 인형. 그리고 마루 인형, 딱지, 종이 인형옷, 소년챔프, 로보트 태권브이…… 딱 붙어서 한참을 구경한다.


인형에 얽힌 일화가 있다. 어릴 적에 못난이 삼 형제 인형을 무척 무서워했던 나는 그것만 보면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어른들은 잠시 나를 혼자 두어야 할 때면 방 안에 나를 두고 문턱에 못난이 삼 형제 인형을 올려놓았더랬다. 그러면 나는 방안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꼼짝하지 않고 그 안에 가만있었다고. 그리고 크게 울었다고.


지금 나는 그 아기 때의 나와 무엇이 다른가. 보이지 않는 못난이 삼 형제 인형이 너와 나 사이에 놓여 있기라도 한 걸까. 나는 너에게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내 마음의 방 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다. 벗어나지 못한 채.

아이였던 시절의 나는 골목대장이었다. 미친 듯이 자전거 경주를 하고 친구들을 제치고 일등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그때의 골목대장은 어디로 간 걸까.

그래도 오늘처럼 너를 여행하는 날이면, 나는 문턱을 넘어 너에게 한 발짝 다가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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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여행가 (by 권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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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