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다
2월 말, 철새를 보러 한강에 왔다가 코로나로 인한 조망대 폐쇄로 씁쓸하게 발길을 돌린 적이 있다. 떨쳐지지 않는 아쉬움에 마포대교 위를 터덜터덜 걷다 한강 위에 떠 있는 카약을 보았다. 두 명의 남성이 카약 위에서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 왠지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들의 진짜 사정이 뭐였던 그것과는 상관없이 내 눈엔 그저 한없이 자유로워 보였다. 그리고 그날 새벽, 어두운 침대 위에서 카약 승선권을 구매했다. 스마트폰의 불빛이 무척 환했다.
기다렸던 날이다. 수영을 하지 못하지만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가득하다. 액비티비가 주는 설렘인지 너로 인한 매 순간의 두근거림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어찌 되었든 오늘의 난 한강을 오롯이 느낄 준비가 되어있다.
한강은 바로 너이기도 하니까.
가는 길은 역시나 험난하다. 항상 길을 헤매는 탓에 조금만 정신을 놓고 있어도 대참사가 벌어진다. 오늘은 6호선을 타야 했는데 7호선을 타고 한참을 와버렸다. 다시 경로를 재탐색한다.
다행히 집에서 일찍 출발했기에 승선 시간에 늦지는 않을 듯하다.
나는 네 주변의 외곽도로를 돌고 있다. 이 길이 잘못 설정된 것이라면 최단기간, 최단경로로 길을 재탐색해야 할 것인가. 그렇지만 혹시 내비게이션이 한길 낭떠러지로 나를 안내하진 않을까.
직진했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절벽 아래로 향하게 되진 않을까. 그곳에는 네가 없을 텐데.
두려운 마음은 경로 재설정을 할 수 없게끔 나를 짓누른다.
가빛섬 승선장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다. 의자에 앉아 솔솔 부는 바람을 좀 느낀다. 날씨가 그새 아주 많이 풀렸다. 전혀 춥지 않아서 카약 타기 좋은 날이다. 한 커플이 도착하여 나와 같이 승선 시간을 기다린다.
부럽지 않다면 거짓이다. 나는 혼자 놀기를 아주 잘하지만 둘이 되고 싶다. 둘이 되어도 혼자 놀게 될 수 있지만 그래도 너라면 하나보단 둘이 낫다. 너와 둘이 되어 보지 않아서, 가보지 않은 길이라 자꾸만 그 길이 생각난다. 그 길을 걷고 싶다. 결국 마음속의 너를 소환하여 하나를 둘로 만든다.
시간이 다 되어 안전수칙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구명조끼를 입는다. 간단하게 노 젓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리고 카약이 있어야 하는 공간에 대한 주의가 덧붙여진다. 반포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에서만 카약을 타야 하고 한강의 가장자리 - 부표 너머와 수풀 가까이 - 에는 갈 수 없다.
너를 대할 때도 이런 금지구역과 확실한 범위가 정해진다면 나는 그 울타리 안에서 좀 더 과감해질 수 있을까?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기에 매사에 조심스럽고 조심스럽고 또 조심스럽다.
카약에 살그머니 올라탄다. 매우 가볍고 작은데 막상 타보니 생각보다 안락하다. 배를 힘껏 밀어내는 손길에 난 뒤로, 아니, 강물 앞으로 밀려난다. 360도 회전을 위해 노를 젓는다. 그리고 지고 있는 노을 방향을 향해 나아간다. 저 멀리 수면 위로 윤슬이 반짝이고 있다.
한강과 이렇게 가까이 있으니 몰랐던 점을 알게 된다. 한강을 새털이 뒤덮고 있다. 모양도 정말 제각각이고 다양하다. 반짝이고 매끈해 보이는 예쁜 깃털 하나 정도는 건져내어 손바닥 위에 올려보고 싶었지만 팔이 닿기에는 너무 멀고 위험하다. 노로 시도해 보았지만 미끄러워 건져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냥 새털이 물을 느끼고 있는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로 한다.
강물의 색이 무척 진해 그 깊이를 알 수 없지만 어째선지 무서운 마음이 들지 않는다. 너의 마음 같기 때문일까.
네 마음의 깊이는 알 수 없는 색으로 짙게 칠해져 있지만 나는 네가 무섭지 않다. 내가 두려운 것은 네가 아니다. 두려움의 원천은 잘 모르기 때문이지만 너를 모른다기보다 머뭇거리는 나 자신을 잘 알지 못해서. 나는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이 마음이 두렵다.
부표 위마다 갈매기들이 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다. 그 모습이 좀 귀여워서 미소가 지어진다.
나도 저렇게 당당히 네 마음속에 한자리 차지하고 싶다. 꼼짝하지 않고 잘 들어앉을 자신은 있는데.
한 마리 새가 물에 닿을락 말락 날갯짓을 하며 내 뒤에서 앞으로 지나간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본다. 평화로운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런 내 모습을 바라보는 눈들이 있다. 내가 다리 위에서 카약 타던 사람들을 지켜보았듯 저 멀리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무척 편안한 마음이 드는데 그걸 느낄 수 있을까? 나의 마음 상태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원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면 그것으로도 괜찮다. 그들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한 사물이 되는 경험도 꽤 값지다.
동작대교 푸른 교각 위로 노란 태양이 붉은빛을 머금고 떠 있다. 해 질 무렵이라 맨눈으로 태양을 바라보아도 눈부심이 심하지 않다. 노 젓기를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노래도 재생시킨다.
분위기가 너무 좋다. 머리 위로는 새무리가 하늘을 새카맣게 활공하고 있다. 망원경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한껏 고개를 젖히고 한참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온몸으로 전해져 온다. 노 저을 땐 몰랐는데 가만있으니 가벼운 카약은 바람과 파도에 하릴없이 흔들린다.
꽤 위협적으로 느껴져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는데 부표를 넘어와 있다. 강의 가장자리로 너무 많이 와버렸다. 주의 지역이다. 얼른 노를 저어 안전지대로 다시 넘어온다.
너라는 위험지역도 마찬가지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너무 많이 와버린 나를 발견했다. 다만 다른 점은 노가 없어 다시 안전지대로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돌아갈 수 없다. 하릴없이 흔들린다. 분명 바람이 불고 마음의 물길이 한 방향으로 흐르는데 너라는 큰 강 위에 홀로 떠 있는 나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자 그때부터는 자꾸 출발 지점을 뒤돌아보며 내가 떠나온 거리를 가늠하고 있다. 당연한 이성적 계산인 건지, 더 나아갔다간 제시간에 돌아갈 수 없다는 두려움의 발로인지 확실치 않다. 아마도 그 둘 다 해당할 것이다.
그런 이유로 지지부진하게 안온하게 짝사랑의 마음만을 간직한 채 네 위에 떠 있다.
한 시간 반이 다 되어갈 때쯤 뱃머리를 완전히 돌린다.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는 방향은 노을의 반대 방향이다. 그래서 가끔 배를 멈추고 360도 회전하면서 노을을 좀 더 바라본다.
조금씩 조금씩 출발 지점은 도착 지점이 된다. 그리고 카약의 도착 지점은 다시 육지 위로 오르는 출발점이 된다.
그 길 위에 다시 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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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며 머물며, 오늘의 BGM>
Like Water (by 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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