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후텁지근하고 눅진한 무언가
편한 반바지에 티셔츠, 모자를 푹 눌러쓰고 거리를 나선다. 짐은 달랑 체이스 체크카드 한 장. 텍사스 오스틴의 여름 평균 온도는 35도. 40도가 넘는 날도 허다하다. 한낮에는 거리를 거닐 수가 없기 때문에 5시쯤 집을 나선다. 걸어서 오분 거리에 밀크티 집이 하나 있다. 체이스 은행 바로 옆이다. 차가운 얼그레이 밀크티 한 잔을 시킨다. 가끔씩 화이트 펄을 넣어먹기도 한다. 근처에서 가장 저렴한 Boba 집이다. 3.5불을 넘지 않는 가격. 밀크티를 한 잔 받아서 정처 없이 걷는다.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을 향해 걷는다.
푹푹 찌는 날씨에 숨이 막힐 때 차가운 밀크티를 한 모금 먹고 다시 걷는다. 뜨거운 날씨에 차가운 음료, 내가 좋아하는 조합이다. 땀이 날 때까지, 내가 가보고 싶었던 곳이 나올 때까지 걷는다. 주로 풍경은 예쁘고 사람은 많이 없는, 그런 곳을 향해 걸었다. 걷다가 앉을 곳이 나오면 앉아서 쉬곤 했다. 모기에 물리기 직전에 일어나 다시 걷는다. 걸으면서 나는 바닥난 통장 잔고와 성추행을 일삼는 알바 사장님과 얼마 전에 잡페어에 가서 넣고 온 이력서를 생각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원하는 장비를 무한정으로 빌릴 수 있는 학교 창고에서 장비를 빌려서 무작정 찍은 영상들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한국에 돌아가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얼마 전 헤어진 남자 친구는 무얼 할까 생각했다.
밀크티와 산책은 나에게는 버틸 수 있는 힘을 주는 하나의 의식이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행복했던 오스틴 시절이 밀크티를 볼 때마다 떠오른다. 어쨌든 살았다. 아무튼 버텼다. 결국 나는 미국 교환 학생 생활비를 내 손으로 벌었으며, 엄마스 키친이라는 한식당 알바에서 성폭행을 당하기 전에 도망쳤고, 기적적으로 다큐멘터리 프로덕션에 인턴 자리를 구해 빛나는 경력을 들고 귀국했다. 삶은 끈적하고 찐득한 무엇인 것 같다. 나는 아직도 후텁지근한 미국 생활이 나에게 왜 그렇게나 자유를 주었는지 스스로에 묻곤 한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이뤄냈기 때문이고, 그 누가 시키지 않은, 온전히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들로 가득 찬 하루하루를 보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가끔은 밀크티를 들고 석양을 볼 여유가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보통 미친 듯이 편집을 하다가, 남들이 다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인 10시쯤에 주방으로 기어 나왔었다. 커피머신에서 커피를 타고, 바닐라 프림을 조금 섞어 테라스로 나갔다. 나는 거기서 한참을 앉아 혼자 하늘을 바라보고,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헤어진 사람을 생각하고,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면서도, 홀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지금에 만족했던 것 같다. 다큐 프로덕션에서 일하는 게, 그때는 참 좋았다. 그때만 해도 방송기자를 해야 할지, 피디를 해야 할지, 아예 마케팅 일을 해야 할지 고민했던 시기였다. 그런 밀크티 타임과 커피 타임들이, 혼자 방으로 돌아와 버텨내던 나날들이 나를 지금의 나로 이끌었다.
3년 뒤 나는 꿈꾸던 자리에 와있다. 그러나 여전히 삶은 버텨내는 것이라는 진리만 깨달을 뿐이다. 입봉을 하기 전, 크게 한 번 넘어질 일이 있었다. 몸이 며칠 째 무리를 해서 목이 돌아가지 않았다. 예고만 만들고 병원을 다녀와야지, 했는데, 선배에게 보여주니 수정사항이 너무 많았다. 내 상태는 심각해져 종이를 쳐다볼 수도 없을 정도로 목이 내려가지 않아 정면을 보고 수정사항을 적었고, 손이 잘 움직이지 않는데도 계속 수정을 하다 병원에 가지 못했다. 갑자기 모든 게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입봉도, 직장도, 모든 것이 말이다. 그날 나는 갑자기 한계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얼마 뒤 나는 퇴근길에 집 대신 광안대교로 걸어갔다. 광안리 공차에서 밀크티를 사서 야경을 보며 걸었다. 비록 내가 좋아하던 호젓한 오스틴 풍경은 아니었지만, 벗고 있는 언니들이 꽤나 많은 여름의 광안리였지만, 그래도 버블티를 먹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여름의 오스틴이 떠올랐다. 지금의 나는 모든 걸 이룬 줄 알았다가, 다시 모든 걸 잃어버린 기분이다. 너는 모든 것을 쥐고 있다고 내 옆의 선배들은 말하는데, 나는 실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사이 마음은 폐허가 된 것 같다. 폐허가 된 마음을 끌어안고 광안리를 걸었다. 뿌연 먼지 속에서 밀크티를 빨았다. 우무 같은 화이트 펄을 꼭꼭 씹으며 울음을 삼켰다. 그렇게 계속 앞으로 걸었다. 그날도 죽지 않고 내 침대로 돌아갔다.
나한테 버블티는 그런 존재다.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뿌연 미래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언젠간 행복한 날이 올 거라고 속삭이는 존재 말이다. 언젠가 청량한 미국으로 다시 가는 행운도 누려보고 싶다. 그렇지만 평생 그리워만 한다고 해도 괜찮다. 밀크티가 단종될 날은 없을 테니까. 난 늘 뜨거운 날엔 찬 밀크티를 빨며 걸어갈 테니까, 보란 듯이 죽지 않을 거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