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내 깔깔 유머집 소유자
"야, 이거 완전 블랙코미디 아니니? 우리 회사의 모든 것이 블랙 코미디 같아." 선배의 말에 응수한다. "그렇죠. 어쩜 캐릭터가 붕괴되지 않고 이렇게 정확하게 유지될 수 있죠?" 우리 회사의 사람들은 어째 늘 예상된 방식으로 기묘하게 행동한다. 몇십 년 동안 한솥밥을 먹은 가족들 같다. 명절에 할머니는 늘 손자들에게 왜 이렇게 살이 쪘냐고 물어보고, 여자 친구는 있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캐릭터가 아주 확실하다. "선배, 그런데 있잖아요. 제가 볼 때는 다들 조금씩 아픈 것 같아요. 그리고 선배도 얼마 전부터 상담받는다면서요. 이제 이거 완전 메디컬 드라마." 선배랑 나랑 파하하 웃는다. 몸이 아픈 사람도 있지만, 마음이 아픈 상태에서 너무 커버린 어른들도 있다. 마음이 아플 때는 제 때 치료를 받고 삶의 항로를 수정해야 하기도 한다.
죽고 싶었던 많은 날들을 건넜다. 이제는 더 이상 죽고 싶지 않다. 가장 죽고 싶었던 여름날, 제주도에 갔다. 가서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왔던 멸치잡이배들을 봤다. LP바에 가서 혼자 음악을 듣고 술을 먹었다. 노을 지는 해변을 바라보며 하이볼에 크림치즈 곶감말이를 먹다가 밤이 되니 멸치잡이배들이 일제히 불을 켰다. 내가 죽고 싶었던 건, 오히려 너무나도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너무 잘, 살고 싶었다. 그래서 돌아와서도 나를 챙기며 일하는 법에 대해 고민했다. "만나는 나쁜 사람들의 악을 빨리 털어버려요." 제주도에서 만난 펜션 주인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적어도 죽어서는 안 되니까. 정의로운 방송을 만드는 것, 시민사회가 좋아하는 방송이라는 것, 꼭 필요한 일을 한다는 것, 모두 다 좋지만, 내가 죽으면 그 무엇도 없기 때문이다.
돌아와 길을 걷다가 DO!라는 카페를 보았다. 희한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무엇을 하라는 걸까. 무엇을 해서라도 나는 내가 지켜야 한다는 것을, 나를 이 환경으로 이끈 것이 나인만큼, 나만이 이 환경에서 나를 빼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했다. 공부하기 시작했다. 주경야독의 시대가 왔다.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어디에 있느냐보다, 지금 내가 행복한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놀랍도록 행복하다. 어떤 일을 하느냐는 나에게 아주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부끄럽지 않을 일을 하면 된다. 너무 나를 몰아붙이치 않는 일을 하면 된다. 다만 누구랑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내가 일로써 믿는 사람 한 명, 내가 사적으로 믿는 사람 한 명만 있다면 직장 안에서 충분히 어떤 상황에도 행복할 수 있다. 내가 키운 힘으로 누군가를 돕고 보호하는 일 자체가 나에게 재밌다. 조직 안에서 내가 처한 상황은 지금이 최악일 수 있지만, 나는 입사 후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 웬만한 일은 블랙코미디라며 웃어넘기고, 불행이 크게 다가오지 않는다. 무뎌졌다고나 할까?
행복하다고 변화가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지만 그만큼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 지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옥에서 꽃을 피워낸 경험이 나를 언제나 지켜줄 것을 안다. 나는 브런치에 처음 글을 쓸 때 내가 실패했다고 확신했다. 실패했으니 꿈을 이룬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꿈을 이뤘다는 말과 실패라는 말이 공존할 수 있음을 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늘 장래희망란에 '기자'를 썼다. 대학을 가면서 그 꿈이 '시사교양 피디'로 바뀌었지만 언제나 같은 궤도를 달려왔다. 시사교양 피디는 티오가 매우 적어서 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어릴 때 꿈을 이루는 사람은 드물다. 어릴 적부터 하고 싶었던 일을 드디어 해낼 수 있게 되어서, 그리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일들을 매일같이 해내면서 나도 할 수 있다고 느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다. 꿈을 이룰 수 있어서 다행이다. 꿈을 이루고 그 일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나는 더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하나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두 번째로는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적당한 꿈과 같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서 만들어낸 꿈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 행위를 할 때 행복하다는 근거로 꿈을 갖고 싶다. 더 어려운 꿈, 이루기 힘든 큰 꿈을 꾸고 싶다. 도달하는 데 오래 걸릴수록, 그동안 행복할 테니까. 그리고 비로소 실현되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는 내공이 생길 테니까. 이번 꿈은 좀 더 천천히 이뤄도 좋을 것 같다. 꿈을 꾸면서 계속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다.
"저거 분갈이해야겠다." 오랜만에 내 집에 놀러 온 엄마의 첫마디. 녹화니, 공부니 복잡하게 살다가 내가 키우던 몬스테라가 아주 구부러졌다. 늘 햇빛을 일정하게 보도록 매일 돌려가면서 애지중지 키웠는데, 녹화 때문에 몇 주 돌려주지 못했다고 아주 한 방향으로만 구부러지게 컸다. 한 번 꺾긴 이후에는 잘 돌아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내 집에 온 엄마는 저렇게 많이 자란 아이들은 그냥 분갈이를 해야 하는 거라고, 분갈이를 안 해주니 밑에 있는 잎들이 모두 노래졌다고 말했다. 때로는, 행복해도 분갈이를 해야 한다. 그래야 더 크게 잘, 살 수 있다. 메디컬 드라마든 블랙 코미디든, 모든 드라마에는 끝이 있다. 메디컬 드라마에서 의사는 결정적인 순간에 병을 고치고, 블랙 코미디 속에서도 로맨스는 늘 이뤄진다. 적어도 내가 주인공인 이 드라마에서 나는 한 막을 닫고 싶다. 스탭 스크롤이 올라간다. 그 안에 있는 모두에게 적어도 감사하고 싶다. "그럼 안녕. 내 꿈을 이뤄줘서 고마워!" 이제 다음 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