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수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지만, 소수에 속하면 살짝 두렵다
지인의 초대로 절두산 순교자 성지를 갔다.
오랜만에 찾은 곳, 합정역에서부터 걸어가는 길의 분위기가 많이 변했는데
세세히 변화를 살필 시간이 없이 허둥대며 갔더니 땀이 주르륵.
10시부터 미사가 시작인데 3분 전 10시에 도착했고,
성당은 이미 만석이라 앉을자리가 없었다.
염수정 추기경님과 다수의 신부님이 집도하시는 미사라 순례자들이
평소보다 두 배 이상 많았던 것 같다.
비집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 문 옆에 서 있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미사참례를 했다.
광복절이면서 성모승천 대축일이라
신부님의 강론에서 2차 세계대전에 대한 언급과
종전 후,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정확한 표현이 기억나지 않는데, 1950년에 성모승천 대축일을
제정한 것과 <인간의 존엄>에 대한 부분을 들었을 때
독일에서 자행되었던 유대안 대학살 <홀로코스트>를 주제로 제작된
영화의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성지 내의 미술관에서 개최된
전시회 제목은 <무명순교자를 위한 진혼곡>이다.
강론을 하신 원종원 신부님이나 정미연작가는 무명순교자를 조명했는데,
나는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건진 사람들을 떠올렸다.
전쟁이나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 장면을 목격한 남겨진 사람들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생각이 이후 이어진 전시회 오픈식,
소규모 연주회의 아름다운 곡을 듣는 순간에도
희생된 사람들이 아닌 목격자들이 계속 따라왔었다.
합정역 인근 <어반 플랜트>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는 시간에만 잠시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나 편안한 쉼을 즐겼다.
선한 지인과 마주하고 있어서 잠시 더위와 생각들이 모두 도망쳤었던 것 같다.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이름값을 제대로 해서 식물원에 앉아서 밥을 먹는 기분이 들었고,
정원을 비롯해 건물 구석구석이 모두 식물이고 옆 테이블과의 거리도 적당했다.
허기진 지인과 나는 커피 한 잔을 곁들인 짭조름한 점심을 맛나게 먹었다.
식사 후 지인의 표정에 피곤함이 드리워져서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졌다.
홀로 남자마자 다시금 내 머릿속을 채운 남겨진 사람들의
불안과 공포와 신념이 공격해서 머릿속이 난장판이었다.
이상한 일은
다수의 사람은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이었다.
순교자들은 죽임을 당할 때는 순간적인 공포와 아픔,
경악과 같은 감정들에 휩싸였겠지만,
<이미 그분들은 이승에 없다.>
공포와 위협과 절망에서 해방된 사람들 아닌가?
남겨진 목격자는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죽음에 맞닿은
공포와 두려움으로 생지옥에서 살지 않았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가?
<개똥밭에서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맞을까?
”도둑이나 살인자를 결코 두려워해서는 안 돼.
그건 외부의 위험이고 작은 위험이야.
우리들 자신을 두려워하자. 편견이야말로 도둑이고, 악덕이야말로 살인자야.
큰 위험은 우리들 내부에 있어.
우리들의 머리나 지갑을 위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영혼을 위협하는 것만을 생각하자. “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발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완전 채식주의자였다.
홍천 외할머니댁에 갔다가 봤던 <소를 나무로 두들겨 죽이는 장면>,
<닭 모가지를 비틀어 죽이는 장면> 등
육식을 위해 동물들에게 가해지는 학대가 어린 마음에 큰 공포로 남아서였다.
그 기억이 고기를 입에 대지 않은 아이로 만들었다.
성인이 된 이후, 고기를 먹기는 하는데, 여전히 좋아하지 않는 편에 속한다.
그런 기억 때문에 난 <남겨진 목격자>가 더 마음 쓰이고 아련하다.
모두가 박해의 희생자들인데 목숨을 잃지 않았다고 더 가벼운 형벌일까?
동시대를 살았던 기록에 남겨지지 않은
다수의 삶이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럽고 힘겨웠을까?
"내 말은 인간은 하나의 폭군을,
즉 무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오.
나는 그 폭군의 종말에 찬성한 거요.
그 폭군이 왕권을 낳았소. 학문은 진리 속에서 얻은 권위인 데 비하여,
왕권은 허위 속에서 얻은 권력이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학문에 의해서만 지배되어야 하오.”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발췌
전쟁이 없는 나라에 살아서 감사하고,
분단국가이지만 독립 국가에서 살아서 감사한 생각을 한 날이다.
편견으로 막말을 서로에게 하는 것은 자주 목격하지만,
상대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이상한 신념에 갇혀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지만,
그래도 21세기의 우리나라는 평화로운 상태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이렇게 말하면 극우에 속한 사람이나
극좌에 속한 사람은 나를 회색분자라고 삿대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눈치 보지 않고 말하자면,
나는 좌, 우를 따지지 않고 <극>이 싫다.
<극>에 속한 사람들이 전쟁을 일으키고,
<극>에 속한 사람들이 학살을 주도했다는 것은 역사를 보면 나타난다.
신념이 죄를 죄라 여기지 않고 신념이 부정을 부정이라 믿지 않게 하는 게 아닐까?
<내로남불> 역시 <극>에 속한 사람들이 말하는 유형 중 하나다.
“성공이란 참 끔찍스러운 것이다.
진실한 가치와 성공의 허울뿐인 유사성이 사람들을 속인다.
군중에게 성공은 우월성과 거의 같은 모습을 띤다.
재능과 쌍둥이같이 닮은 성공에 속는 것이 있다.
즉 역사다.
오직 유베날리스와 타키투스만이 그것에 대해 불평한다.
오늘날에는 거의 공인된 철학이 하인의 신분으로
성공의 집에 들어와 사환복을 입고 그 응접실에서 시중을 든다.
성공하라. 이것이 학설이다.
<영달>은 곧 <능력>이라고 추측된다. ”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발췌
운명은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진 게 아니라
각자가 선택한 것이 쌓인 것이 운명이라고 믿는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인생은 선택이다>
이러한 문장을 좋아하니 스토아철학을 옹호한다고 봐야 할까?
오늘은 글이 직관적이기보다 살짝 과격한가? 단호한가? 어쩔 수 없다.
광복절이고,
가톨릭을 믿는다는 이유 하나로 무더기로 목숨을 잃은 장소인 절두산 성지를 다녀왔으니,
적어도 < 나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라는 문구라도 혼자 외칠 수밖에.
<오늘의 이미지 작업은 같은 장소, 시간에 시선을 둔 위치에 따라 보이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