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 짐베르크의 그림 한 점에서 출발한 이야기
비가 내렸었다는 흔적만이 가득한 공간,
빗소리를 들었던 듯한데, 휴식 시간마다 창밖을 보면
나뭇가지와 잎에 방울방울로 남은 비,
바닥에 흥건한 물웅덩이와 같이 비가 남긴 흔적만 있곤 해서 묘했다.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려 했던 시도가
실패로 끝났음을 증명하듯이 집중력이 떨어졌다.
책장에서 그림책을 꺼내 펼쳤는데,
생각이 사방으로 흩어지게 할 작품이 펼쳐졌다.
머피의 법칙처럼 이 무슨 놀라운 현상일까?
오늘의 작업은막을 내려야 할 듯해서 아예 하던 프로그램을 껐다.
내 작업을 아예 중단시킨 그림은,
핀란드의 상징주의 화가 유고 짐베르크의 < 부상당한 천사 >였다.
오늘의 날씨,
즉 비가 내렸다 멈추었다가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는 날,
< 부상당한 천사 >를 보게 되자
어쩌면 오늘의 비는 부상으로 절뚝이면서 우리에게 오는 게 아닐까?
가도 너무 갔네? 까르륵까르륵 웃었다.
천사의 눈이 가려져 있으니,
보지도 못하고, 들것에 실려 가는 중이니 분명 부상 부위가 날개일까?
상징주의 화가의 그림엔 기호가 많이 있어서,
이 그림이 상징하는 게 무엇인지를 파악하려면 기호들을 해체했다가
다시 조합하기에 따라 순간순간 다른 해석이 탄생하므로 재미있는 게임 같다.
그림은 항상 그대로인데 마주할 때마다 해석이 바뀌니 이 그림은 명작이다.
천사가 직접 자기의 눈을 가린 것이라면, 부끄러움의 표시일 수 있고,
사람들이 가린 것이라면 천사는 납치당하는 중일 수 있다.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에 날개가 있었다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지만,
그건 새가 자기 날개에 대해 갖는 느낌과는 다르다.
괴물에게는 자신이 정상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인다.
정신적인 괴물은 정상적인 사람과 비교할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으므로 이런 현상들이 훨씬 더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처음부터 양심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죄를 짓고 번뇌에 시달리는 사람을 우습게 볼 것이며,
범죄자는 정직한 사람을, 어리석다고 생각할 것이다.
어쨌든 괴물은 변종이라서 정상적인 것을 기형으로 본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에서 발췌
자의냐 타의냐에 따라 이야기의 전개는 완전히 다르게 전개되는
<부상당한 천사>를 감상하다
문득 사람들이 가진 날개는 <선택의 자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 날이다.
<선택권>을 빼앗긴 상태는 부상당한 날개와 같지 않을까?
선택의 자유를 완전하게 빼앗겨 본 적이 있었나? 있었다.
성년이 되기 전 어린이였을 때는
자유롭게 선택하기보다 환경에 제지당한 부분적 선택권이다.
환경에 이끌려서 혹은 떠밀려서 가야 하는 어린이의 상황. 이렇게 가정해 보니,
작가가 천사를 데리고 가는 사람을 아이로 설정한 이유가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날개를 펼치고 날아다니다 고단하면 쉴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
성인이 된 후부터 오히려 웃음이 줄어든 삶이라는 게 아이러니지만,
다시 어린아이로 되돌아가기 싫다.
몸은 하루하루 주름살이 늘어나지만, 나는 현재가 좋다.
과거의 어느 시절로도 돌아가기 싫은 까닭은?
현재의 삶이 만족스러워서가 아니라
되돌아가도 난 여전히 같은 선택을 하면서 살 것이라고, 확신해서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했었다.
보면서 감탄했었던 첫 번째 요소는 제목이었다.
살면서 실수하고, 잘못 결정하고, 오해와 같이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어긋남이
정당화가 될 수 있는 제목이니 얼마나 멋진 제목인가.
”나는 거짓말과 이야기의 차이점을 이렇게 생각한다.
이야기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흥미를 자아내기 위해 진실이라는 외형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야기 자체에는 이득이나 손해를 볼 것이, 전혀 없다.
그러나 거짓말은 이득을 보거나 회피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만약 이러한 정의를 엄격히 따른다면 이야기를 꾸며내는 작가도
거짓말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가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글을 쓴다면 말이다. “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에서 발췌
<부상당한 천사>는 개개인이 사회화하는 과정을 그린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날이다.
개성을 둔화시키고, 다루기 좋은 뭉툭한, 말 잘 듣는,
그런 사람으로 키우려는 욕심으로 어른들이, 도시가, 국가가 조직적으로 부러트린 날개?
어이없는 생각으로 뻗어나가기 전에 이쯤에서
나는 < 선녀와 나무꾼 >에서 나무꾼이 감추어 두었던 날개를 되찾아 날아가는 천사를 소환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겐 날개가 있을 수 있다.
그 날개를 찾아서 가고 싶은 방향으로 훨훨 날아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은 급물살을 타고 흐르다가
<시간에 달린 날개는 한쪽이라 한 방향으로만 날아간다 >라는 문장을 쓰고 나서
이야기를 만들었다.
시간은 왔던 곳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날개라서
퍼덕일 때마다 알 수 없는 어딘가로 날아간다.
우리는 시간을 잡아 놓을 수없어서 시간과 함께 날아다니길 소망한다.
<기억에 달린 날개는 여러 쌍이다>라는 문장을 만들고 나서는,
기억이라는 이름의 날개는 현재와 과거처럼 시간의 구조를 따라 날기도 하고
여기에서 저기, 이곳에서 그곳처럼 공간 이동을 한다.
이렇게 단어와 단어 사이의 공간은
무수히 많은 이야기를 초대할 공간이 있어서
존 스타인벡이 말했듯이 거짓말, 이야기가
개척지를 개간할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한 날이다.
나는 거짓말쟁이? 나는 이야기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