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트란스트의 시 <뢰메르>의 시구 중에서 2인칭을 1인칭으로
나는 지금 어디를 보고 있지?
자문이 시작된 배경엔, 오늘 책 표지 일러스트를 넘겼는데,
이미지의 제목이 <순례길>이었으므로 불현듯 궁금했다.
욕심이 내가 이미 가진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것을 탐하다
가진 것까지 잃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자문이었다.
잃어버리면 가장 아까울 품목은 평화와 사랑과 자존감이다.
쉽게 깨질 수 있고 또 잃을 수 있는 그러한 마음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긴 찰나에
스웨덴의 시인인 토마스 스트린트의 시구절이 퍼뜩 떠올랐다.
“네 안에서 끝없는 방들이 열린다. 너는 결코 끝까지 가볼 수 없을 것이다. “
-토마스 트란스트의 시 <뢰메르>에서 발췌
내가 아는 나와 남이 아는 내가 다르다고 한다.
소통의 문제일 수 있고, 판단의 오차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른 게 당연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어서
내 욕심이 눈을 가려서 팩트체크에 오작동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까지
비집고 들어서 자
여우가 자기 입에 고기를 물고 개울을 건너가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는
물속의 고기가 탐나서 그 고기를 빼앗으려고 입을 벌리는 찰나에
입에 물고 있던 고기를 물속에 빠뜨린 우화가 떠올랐다.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은
갖고 있어도 더 가지고 싶은 욕심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욕심은 나쁜 게 아니지 않나?
MBTI 테스트에서는 ENTP라는 유형 판정을 받았지만,
나는 외형적인 면보다 내성적인 면이 더 강하다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쾌활함? 침묵이 어색하지 않을 땐 침묵을 좋아하지만,
어색하게 느껴지면 내가 먼저 그 어색함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구로
아무 말이나 마구 던지면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해서 외형적으로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내가 속한 공간의 어색함이 제일 못 견디는 부분 중 하나이니까.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내가 속으로 <내 코가 길어지고 있어>라고 속삭인다.
그러한 행동을 하는 나 스스로가 버거웠던 것이라
그 순간의 내가 나를 속이는 행동으로
피노키오처럼 코가 길어진다는 상상으로 내가 나를 웃긴다.
“몽상적인 사람은 어서 빨리 만족할 만한 위업을 달성하여
모든 사람이 자기를 우러러봐 주길 갈망합니다.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렇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목숨조차도 내놓을 것이지만,
다만 그것이 오래 지속되지 않고 마치 연극무대에서처럼
빨리 성사된다는 조건으로만 말이죠.
실천적인 사람, 그것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이들에게는 말하자면 완전히 학문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발췌
사람의 유형을 굳이 분류하자면 나는 ENTP라 몽상가적인 성향이 짙은 사람이다.
산에서 낚시하는 유형이라고 심리학자가 말했었다.
너무 엉뚱한 성격이라 어색한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들었던 조언 중 하나는 한 신부님의 조언이었다.
그 신부님은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매님은 어떤 친구가 집 안으로 들어갈 때
신발을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그 친구를 불러 세운 후
그런 행동은 타인에게 불편한 행동이니
신발 정리를 제대로 하고 들어가라고 말하지 않고
속으로 그 친구의 그런 행동에 이맛살을 찌푸리고 넘어간 후
그 친구가 했던 행동으로 그 친구를 기억할 것입니다.
나쁜 성격이니 고치세요! >
오랜 기간 그 조언을 되새김질했었다.
너무 정확하게 그때의 내 성격을 짚어내신 게 놀라워서
그 당시엔 그 신부님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도 드리지 못했었다.
되새김질의 효과인지 지금은 바로바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거슬렸던 부분을 그때그때 바로 짚고 넘어간 일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라도 그 신부님을 뵙게 된다면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
”그대가 누구의 심판자도 될 수 없음을 특별히 기억해 두어야 한다.
이는 이 심판자 자신이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죄인이며
그 심판자야말로 자기 앞에 서 있는 자의 죄에 대해
그 누구보다 더 많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전에는
지상에는 죄인의 심판자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발췌
사람과의 관계에서 내가 기분이 상하면
상대방도 똑같이 기분이 상한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다툼을 피해 갈 수 있지 않을까? 관계에서 일방적일 수 없을 때가 더 많으니까.
도스토옙스키의 문장에서처럼,
남을 심판할 자격이 없는 나는 사회에 큰 무리가 될 사고나 행위의 죄를 짓지 않는 이상
심판대에 설 일도 없을 테니
스스로 심판하고 스스로 판결하고 스스로 고쳐가는 일상이 되면 맞겠지?
내일은 또 다른 내가 나타나서
오늘의 내 생각과 행동의 사소한 문제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비밀이 밝혀지기 전까지
나에게는 두 개의 진리가 존재하는 셈이야.
하나는 저 세계의 것,
저쪽의 것으로서 아직은 내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진리이고,
다른 것은 나 자신의 진리지.
그리고 어떤 것이 더 순수한지는
아직 알 수 없는 거야."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발췌
오늘도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올인했으니,
내일도 아마 나는 내일의 내가 옳다고 믿는 것에 또 올인할 것이다.
결과에 좌지우지하지 않고,
순간에 충실하고 성심을 다하는 그런 모습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