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가 부르는 모든 이미지는 마법이지만, 빗소리는 더 특별하다
소리에 기대는 습관은 내가 지닌 사랑의 습관 중 하나이다.
알람설정 없이 잠에서 깨어나는데, 잠에서 나를 깨우는 소리가 있는 듯
내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게 일어나곤 한다.
잠에서 깨어나면 모습은 보여주지도 않는 먼 거리에서
새들의 수다? 음역대도 다르고 음색도 다른 새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듯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지저귀는 소리는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방언 같은 새들의 이야기를 듣다 침대 밖으로 나온 후에는
조금 더 구체적인 소리의 유혹에 이끌려
음악을 틀고 볼륨을 높이고 높인다.
밤을 함께한 공간의 차분함이 한꺼번에 깨어나는 소리.
이처럼 소리에 기대어 하루를 시작한다.
지금 창밖에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빗소리가 요란해질수록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대지로 내려앉는 어둠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로 가라앉을까 염려되어
정일근 시인의 시집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를 꺼냈다.
삶에서 기다림 역시 사랑의 습관 중 하나이므로,
많은 시집 중, 이 제목에 눈길이 멈춘 것 역시 소리가 이끈 셈이다.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먼바다로 나가 하루 종일
고래를 기다리던 사람을 안다.
사람의 사랑이 한 마리 고래라는 것을
망망대해에서 검은 일 획 그으며
반짝 나타났다 빠르게 사라지는 고래는
첫사랑처럼 환호하며 찾아왔다
이뤄지지 못할 사랑처럼 아프게 사라진다"
-정일근의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발췌
빗소리를 따라 걷는 길은
운율로 꽉 찬 길이고, 기다림이 녹아있는 길이다.
기다림에는 어김없이 사랑이 숨어있고,
그리움도 깔려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짙어지는가 아니면
옅어지는가에 따라서
그 기다림에 속한 사랑의 가치를 헤아려보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쾌락을 주지 않고서는 받을 수 없으며,
몸짓 하나하나,
어루만짐 하나하나,
접촉 하나하나,
눈길 하나하나가 모두 제각기 비밀을 지니고 있으며,
인체의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 하더라도
각기 나름대로 비밀을 지니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비밀은 자극받아 깨어나면
그 비밀을 아는 사람에게 아무 때라도
행복감을 안겨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에서 발췌
사랑의 색, 그리움의 색, 기다림의 색은
왠지 핑크에서 보라로 넘어가는 스펙트럼에 속할 것 같다.
그래서 색의 문화적 비밀을 들추면,
그 스펙트럼에 속하는 색들은 <신비, 사랑스러움, 여성적인, 여린> 분위기를 빚어낸다.
그래서 오늘의 저녁은 핑크가 터지는 소리처럼
핑크핑크하면서 놀았다.
핑크 하니 마음이 펑펑펑 넉넉해지고
핑크 하니 시선이 닿는 모든 사물이 바스락바스락 사랑스럽게 몸을 뒤튼다.
펜이 움직이는 소리를 따라 드로잉에 핑크색 계열의 단색조로 연꽃을 표현해 보니,
심청이를 기다리는 심봉사가 떠오르고
첨벙첨벙 물로 뛰어 들어갈 준비를 하는 청개구리도 생각나고,
비와 연꽃과 물은 이렇게 이야기로 연결되고
그 이야기들은 마음 한편에 그리움의 장소를 만들고,
나는 그런 모든 요소들을 빗소리에 기대어 풀어내고 있다.
나와 시간을 나누는 사람들에게 감사와 사랑의 인사를 전하고 싶고,
시절인연으로, 기억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에게는 평화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왠지 센티멘탈해지는 저녁에 보내는 안부?
지인의 낭랑한 음색으로 시낭송을 들으니
내 호흡이 번지는 이 공간의 분위기는 젤리처럼
촉촉하고 말랑말랑하고 달콤해진다.
빗소리와 펜이 종이 위에서 미끄러지는 소리,
지인이 읊조리는 시의 언어와 함께 소리와 소리들이 합주하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