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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Apr 26. 2020

어쩌면 일어날 지 모를 기적

다섯번째 이야기, 2020년 4월 26일 일요일. 날씨 더움.

기적이란 단어는 그 단어의 본래의 뜻이 그러하듯 자주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절대로 일어나거나 이뤄지지 않을 것만 같은 좋은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기적을 말하곤 한다. 물론 세상을 달관한 온화한 표정으로 "제겐 매일매일이 기적이예요"라 말하는 이도 있지만, 별로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해질녘 아파트 옆 귀퉁이에 마련된 흡연공간에서 담배를 피웠다. 로또는 언제되나, 혼잣말을 해보다가 로또가 되면 그건 기적일까 생각한 적이 있다. 참으로 한심한 장면 같지만 어떤 목표에 골몰해 있지도, 허무맹랑한 기적을 바라지도 않는, 적당한 포기와 적당한 의욕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그날 저녁이 나는 꽤 멋지다고 생각했다. 멍한 표정으로 현관문을 열면 천진난만한 아내와 아이가 나를 바라보는데, 음 기적을 바라며 마음을 졸일 바에야 아내와 아이 옆에 앉아 맥주를 마시는게 낫겠다, 싶었다.


어쩌면 일어날 지 모를 기적

아. 오늘은 좀 고단한 하루였지? 난생 처음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가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 그리고 큰 개와 강아지와 고양이도 보았던 하루였구나. 잘 울지 않는 네가 큰 개를 보고 겁을 집어먹고 울음을 터트려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아파트에선 느끼기 어려운 햇빛과 바람과 새소리, 보이지 않는 것들이 움트고 숨을 죽이는 모습들이 네게도 느껴질까 싶어 기대가 되기도 하였단다.


한 10년 전쯤, 아빠도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과 그 집에서 도란도란 살 때가 있었어. 그땐 지금보다 마당이 넓었었는데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마다 뚜렷하게 제 옷을 바꿔 입는 우리집 마당이 지금은 퍽 그립기도 해. 오늘 네가 갔던, 아빠가 오랫동안 살았던 그 집은 아빠의 아빠, 아빠의 엄마가 이십년 가까이 가꿔온 보금자리야. 아마도 고등학교 2학년 때였을까, 집이 완공되고 이사를 마치자 네 할머니가 환호성을 지르며 아빠에게 뛰어오셨던 기억이 나. 꿈이셨거든. 마당 있는 집.

네가 걷고 뛰고 말할 때 쯤에도 이 집이 지금처럼 있었으면 해. 눈 오는 날, 아빠가 바라봤던 앙상한 벚꽃나무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자작나무 건너편 데크에 앉아 아빠가 그곳에서 살던 때의 이야기를 두런두런 할 수 있다면, 그 별거 아닌 일이 훗날의 너에게도 하나의 기억이 되겠지. 오래전 할머니가 아빠에게 그러셨거든. 네가 이곳에서 지냈던 나날들이 언젠가 너무너무 그립고 아름답다, 생각되는 시기가 있을거라고.


오래 전일 같지만, 몇년 전만 하더라도 오늘 네가 갔던 집이 우리 집이 아닐 뻔한 일들이 있었단다. 간신히, 어떻게든 지켰다고 해야 하나. 할아버지, 할머니는 앞이 깜깜하셨고 모르긴 몰라도 눈물을 흘리실 정도로 힘든 시간을 겪으셨지. 드라마에선 흔히 빨간딱지가 붙고 "집이 넘어갔다"라고 말하곤 하는데, 네가 오늘 갔던 그 집도 그럴 위기에 처했었단다. 현실이 된 할머니의 꿈이, 간밤 꿈처럼 사라질 뻔 한 위태로운 시간이었지.


기적이라 말하긴 어렵겠지만, 아마도 할머니에겐 기적일 수 있을 것 같아. 집을 잃지 않고, 집을 지켜내고 아들의 아들을 이 집에서 맞는 오늘이 아빠의 엄마에겐 어쩌면 기적같은 일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 ♣


이번주 봄이는

다른 집 애도 그런가. 좀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순하다. 별로 울지도 않고, 배고프고 졸릴 때만 조금 앙탈을 부린다. 낯을 가리지도 않아서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들에 순순히 잘 안긴다. 그 모습을 보고 '아, 나를 알아보고 내게 잘 안기는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어 다소 서운했다. 그런데 오늘 본가에서 기르는 골든 리트리버가 아내에게 엉겨붙자 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엄마가 개때문에 다소 놀란 표정과 소리를 내자 봄이가 반응한 것인데, 그게 퍽 대견했다. 토요일엔 이름 모를 접종을 했다. 한달만에 맞는 주사에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이번주 아내는

많이 졸려하신다. 지금도 시댁에 다녀오시자마자 봄이와 뻗어서 주무시고 계신다. 어제는 감자탕을 해주셨다. 임신, 출산 이후 처음 청하를 드시고는 얼굴이 빨개지셨다. 요즘 브이로그 영상 만드시는 것에 빠지셔서 대부분의 일상을 영상으로 기록하신다. 꾸준히 하면 참 좋은 일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이것저것 관심가는 것을 시작했다가 휙 던져 버리기 일쑤인데, 이번 브이로그는 얼마나 갈지 내심 궁금하다. 유명 유튜버가 되어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편집자로 일할 수 있게.


이번 주 아빠가 읽은 문장

주먹 쥔 손에 작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희미하게 점멸하며 살아있다. 모든건 사라지지만, 점멸하는 동안은 살아있다. 지금은 그 모호한 뜻만으로 충분하다.

-권여선, 전갱이의 맛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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