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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May 02. 2020

등산화 버린 날

여섯번째 이야기, 2020년 5월 2일 토요일. 날씨 흐림.

취미랄게 없었다. 일하고 마시고 자는게 일상이었다. 한때 소설과 시, 영화 리뷰도 좀 써보았지만, 힘에 부쳤고 금방 지쳤다. 한마디로 오래가지 못했다. 어떤 날은 휴일이었는데 할 게 없었다.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가 있었는데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게 더 지겨울 것 같았다. 불꺼진 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나을 때도 있었다. 취미가 뭐냐는 질문은 꽤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산에 간게 2017년 초 쯤이다. 선배들과 술을 마시다 히말라야 이야기가 나왔고, 술김에 가고싶다 하였다가 꼼짝없이 붙잡혔다. 지리산에 연습삼아 올랐다가 낙오했고, 이후부터 틈만나면 산에 갔다. 하다보니 안되던게 되니까 재밌었다. 가다보니 가고싶고 가고싶어 계속 가게 되었다. 취미가 뭐냐는 질문이 더이상 무례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취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등산화 버린날

봄아. 아빠는 네가 새벽잠이 깨기 전 짐을 챙겨 북한산에 다녀왔어. 어젯밤 엄마가 만들어준 유부초밥을 가방에 넣고, 차에 앉아 시동을 걸었는데 해가 뜨기 전 헤드라이트를 켜고 엑셀레이터를 밟는 순간 슬그머니 웃음이 나더구나. 무언가가 떠올라서 웃었던게 아니라 나도 몰래 웃음이 나는 것. 때때로 그럴 때가 있는데, 아빠는 그런 순간들이 어떤 순간보다 귀중하다 생각해. 스스로 즐거워 즐겁다 느끼고, 스스로가 괜찮다 다독여 괜찮다 느끼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런 것 같아.


오늘은 아빠가 삼사년간 신었던 등산화 대신 새 등산화를 신고 다녀왔어. 원래 아빠는 등산화가 두 켤레 있는데, 하나는 깊고 먼 곳에 갈 때 신는 등산화고, 다른 하나는 당일 등산에 적합한 등산화였어. 보통은 당일로 3~4시간 오르내리는 게 대부분인지라 당일 등산에 적합한 등산화만 꽤 낡았었거든. 고르고 골라 할인하는 순간만을 기다려 새로 산 등산화를 처음 신고서 땅을 밟는데 괜히 마음이 붕- 뜨더라. 몇살이든 어리든 나이가 들었든 자기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일이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인 것 같아. 참 어렵거든. 뭘 좋아하는지 알게 되는게.


산안개가 많이 끼고 바람이 거세 운해가 산을 타고 넘어가는게 한눈에 보일 정도였어. 젖은 바위와 비탈을 차례로 밟아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는데 어제 버린 헌 등산화가 생각나더라. 버리지 말 걸 그랬나 싶었어. 버리기 직전에도 마음이 쓰여 사진을 찍어 놓았는데, 역시나 버리지 말걸 싶더라구. 이유는 모르겠어. 아꼈던 신발도 아니었는데.


그 등산화는 아빠가 산에 다니기 전, 아빠의 첫 직장에서 선물로 준 등산화였어. 그땐 등산 다닐 때가 아니라서 일년이년 신발장에만 쳐박혀 있었는데 우연찮게 산에 가기 시작하면서 자주 신는 신발이 되었던거지. 누가봐도 그저 아저씨 등산화였는데, 접지력이 좋고 튼튼해서 꽤 괜찮은 녀석이예요, 정도는 말할 수 있었던 것 같아.


이리저리 깨지고 갈라진 밑창과 구멍난 안감을 보면서 대견하다 싶었어. 그러다 대견한게 아니라 고마운 거구나 싶었고, 고마웠습니다, 말하게 되었어. 괜히 버렸나 싶었는데, 오히려 그 마음 때문에 그 등산화가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주 봄이는

황금연휴를 맞이하여 난생처음 근교의 유명한 카페에 데리고 가보았다. 카시트에 눕혔는데 차가 움직이면 울지 않고, 차가 정차하면 우는 패턴을 발견했다. 근교 카페에 가서는 낯설어하지 않고 두리번두리번 잘 구경하고는 집으로 복귀하였다. 이번주는 접종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주사를 두 대나 맞으니 눈물을 펑펑 쏟았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버스 정류소에 앉아 목련꽃 떨어지는 거 본다

정확한 노선을 따라가는 세월 보려고

- 박서영, 미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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