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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May 17. 2020

산책할 수 있는 사람

여덟번째 이야기, 2020년 5월 17일 일요일. 날씨 흐림.

산책이란 단어는 그저 천천히 걷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의 이동은 대부분 무엇을 하기 위해 이뤄지지만 산책을 한다 함은 그저 발걸음을 옮겨 걷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꽤 가벼운 일이다. 하지만 산책이란 단어는 반려동물을 '산책 시킨다'는 말로 가장 많이 쓰일만큼 우리 삶과는 꽤 동떨어져 있다. 정작 자신을 산책 시킬 생각은 못한 채 바삐 일하고 드러눕는다. 먹고 보는, 먹방의 시대에서 산책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에서 소외되고 있단 생각이 든다. 나는, 지난해부터인가, 걷고 쓰는 일을 최고로 친다. 드러누워 먹고 봐도 가시지 않던 피로가 걷고 쓰면 풀렸다. 제각각 몸과 마음의 피로를 풀어줄 특효약이 있을 지 모르겠다. 내겐 걷고 쓰는 일이 꽤 신통방통한 나름의 처방이었는데 반대로 걷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면 귀신같이 마음이 우중충해졌다. 우중충한 마음을 들여다보면 이런 단어들이 있었다. 허무하다, 지친다, 불안하다. 참 무서운 단어들이다. 걷고, 쓰자.


산책 할 수 있는 사람

아. 이번주엔 엄마아빠가 너를 보고 깜짝 놀랐어. 바로 누운 네가 몸을 뒤집었거든. 통상 뒤집기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번주 네가 처음 뒤집었단다. 그게 뭐 별거요, 할 수 있지만 걷기 위해 기어야 하고 기기 위해선 뒤집어야 하기 때문에 스스로 뒤집을 수 있다는 건 꽤 별 것이란다. 물론 단 한 번 뿐이었지만, 그 한 번이 두 번과 세 번을 만들어 낼 것이므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어젠 너와 내가 처음으로 함께 산책을 한 날이었어. 집 근처 천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는데 봄꽃향이 가득하고 오리랑 왜가리도 보이고, 백색 잉어와 그를 따르는 검은 잉어들도 많이 있어서 꽤 괜찮은 산책길이었단다. 아빠와 나이가 비슷한 사람들은 유모차에 누운 너를 흴끗 보고 지나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너를 보고 옛생각이 나시는지 혼잣말을 하시거나 내게 말을 거셨어.

산책길이 좋아서였을까. 휠체어를 타신 할아버지, 할머니도 많이 계셨어. 그 휠체어를 끄는 이들 또한 할아버지 할머니 같았는데 그 모습이 아빠 눈엔 오래 남았어. 네가 누운 유모차와 할아버지 할머니의 휠체어가 교차하는 순간마다 마음이 어수선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마음을 조렸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아빠는 왜 그랬을까. 아마도 이 대답은 시간이 꽤 흐른 뒤에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혼자 걷는 것도 좋지만, 둘이 걷는 것도 꽤 즐거운 일이었어. 아빠는 이가 산책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 별 생각없이 이곳 저곳 두리번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네가 상상할 수 없었던 작은 풍경들을 만날 수 있을거야. 그리고 그 작은 풍경들이 네 마음에 들꽃이 될꺼야. ♣


이번주 봄이는

뒤집어 버리셨다. 그러나 단 한 번 뿐이었다. 하루하루 땡깡이 늘어가는 것 같은데, 이정도는 땡깡 축에도 못낄 것이란 생각도 들면서 그러려니 하고 있다. 새벽녘 입맛 다시는 소리는 이제 옹알이로 바뀌었고 삼십분에서 한 시간 가량 지속한다.


이번주 아내는

애기 땀띠에 경각심이 높아져서 요즘엔 거의 애기를 벗겨 놓는다. 족저근막염은 쉬이 낫지 않고, 머리카락도 여전히 많이 빠진다. 먹태에 빠지셔서 마요네즈와 청량고추와 간장을 섞은 소스와 맥주를 끼니처럼 드신다. 나는 옆에서 소주를 마시는데 그 풍경이 나쁘지만은 않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주인공은 산책을 '의미 없이 걷는 즐거움'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그렇게 걸음으로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는 에피소드를 만화의 축으로 삼고 싶다고 생각했다.

-쿠스미 마사유키, 우연한산보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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