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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May 22. 2020

몇년 만에 도서관에 앉아

아홉번째 이야기, 2020년 5월 22일 금요일. 날씨 흐림.

올해로 직장인 10년차다. 10년 차 직장인이 평일에 도서관에 올 일은 없다. 몇 년 차든 마찬가지다. 도서관은 돈을 벌기 시작하면 멀어지는 공간이다. 돌이켜보면 어릴 땐 도서관이 놀이터였다. 부모님도 도서관 가는 것엔 별 말이 없었고, 그렇게 집을 빠져나온 아이들이 도서관에 자릴 맡고 밖에 나가 노닥거렸다. 내가 살던 동네의 도서관은 한강변에 있었다. 계단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며 시덥지 않은 이야기들을 조잘대다가 해가 지면 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해질녘엔 한강물이 넘실넘실 주홍빛이 들어 반짝이곤 했는데 그런 날은 꽤 상기된 마음으로, 우리는 나중에 어떻게 될까, 같은 이야기도 나오곤 했다. 보통은 한강에 괴수가 출현해 시험이 연기됐음 좋겠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몇년 만에 도서관에 앉아 

아, 오늘 아빠는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 앉아 있어. 평일 대낮에 도서관에 온 게 얼마만일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아빠가 대학을 다니고 있을 때였던 것 같아. 꽤 오래전 일이지. 10년도 넘었으니까. 


사실 도서관은 오히려 공부할 게 없을 때 어슬렁 어슬렁 돌아다니기 좋은 곳 같아. 정말 공부를 해야 해서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든. 실제로 아빠는 별일이 없어도 도서관 이곳저곳을 산책하듯 돌아다니길 좋아했었어. 특히 아무도 찾지 않는 책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면 마치 아주 오래된 무덤가를 거니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내가 지금 펼친 이 책은 얼마만에 펼쳐진걸까, 생각하며 이책 저책 들추다보면 아주 오래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었어.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지금 나도 기억할 수 없는 어떤 문장들 말야.


지금 아빠도 그 때를 떠올리면 어떤 여름날의 잔상만 떠올라. 일렬로 수도 없이 늘어선 책장들 사이사이로 바람이 불고, 그곳에 있으면 가끔씩 서늘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지금 이곳은 참 좋은 곳, 같다고 느꼈던 것 같아. 언젠가 대학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었을 때, '창가의 토토'란 책을 빌려 읽은 기억이 나는데 그 때 그 책이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네 태명을 '토토'라고 지었었단다. 네가 글을 읽을 수 있을 때 쯤이면 아빠 책장에 꽂힌 그 책을 너도 볼 수 있을텐데, 네 태명과 그 책의 연관관계를 말해줄 수 있는 어떤 날이 참 기대가 돼.

<창가의 토토>의 삽화를 그린 이와사키 치히로의 그림

돌이켜보면 아빠는 아빠의 아빠와 도서관에 간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 할아버지는 책을 좋아하셨고 심지어 생일선물을 사주시겠다며 서점에 데려가셨을 정도였는데, 도서관에 함께 가보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쉬워. 그런 기억, 그런 풍경이 아빠에겐 없는 거니까. 이 네가 커서 도서관에 갈 수 있을 날이 오면 아빠와 함께 미로같이 크고 넓은 도서관에 함께 가서 서로가 서로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려보자. 그런 날이 겹겹이 차곡차곡 쌓이다보면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은 어떤 순간들로 남게 될거야. ♣


이번주 봄이는

'자유자재'까진 아니지만 매트에 누워있다 뒤집고 되짚기를 힘겹게 해낸다. 이빨 날 때가 된 건지 간혹 짜증을 심하게 내기도 한다. 매일 보는데도 아주 잠시 잠자코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 저렇게 컸지, 싶다.


이번주 아내는

족저근막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집에서만 신는 크록스를 신고는 대단한 만족감을 보이고 있다. 아침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내려주고 저녁엔 돼지갈비찜, 닭갈비와 같은 고급 요리를 해주셨다. 본인은 다이어트에 돌입해 별로 먹지 않는데, 맥주를 참는걸 보면 어떤 부분에서는 의지가 참 강한 것 같다고 느꼈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저수지 너머 겹겹이 펼쳐진 산들 위로 해가 지고 있었다. 골짜기의 깊은 곳부터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는 가장자리부터 어두워지는 저수지 물과 그 위에 비친 산그림자가 짙어지다 물감처럼 풀리는 모양을 오래 지켜보았다. 어디선가 새가 날아와 나뭇가지에 내려앉았다. 날갯짓의 급격한 감속, 날개를 접고 사뿐히 가지에 착지하는 모습, 가지의 흔들림과 정지...... 그런 정물적인 상태가 얼마나 지속되었을까, 새는 돌연 가지를 박차고 날아갔고 그 바람에 연한 잎을 소복하게 매단 나뭇가지는 다시 흔들리다 멈추었다. 멍하니 서서 새가 몰고 온 작은 파문과 고요의 회복을 지켜보던 그는 지금 무언가 자신의 내부에서 엄청난 것이 살짝 벌어졌다 다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 권여선, 모르는 영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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