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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Apr 12. 2020

기억력이 좋은 나의 오랜 건망증

세번째 이야기, 2020년 4월 12일 일요일. 날씨 바람(중)

어릴 적부터 드래곤볼보다 아기와나를 좋아했다. 진이와 신이의 처지가 어릴 적 나와 비슷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테다. 국민학교 사오학년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방에 틀어 박혀 아기와나를 보면서 낄낄대다 꺽꺽대고 울어버리는 통에 부끄러워 문을 잠그기도 했다. 엄마가 없다는 사실과 그 사실에 기대지 않은 어떤 가족, 어떤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게 적잖이 위로가 되지 않았었을까, 싶다. 아, 이런 일도 있구나, 엄청나게 아파해도 괜찮은거구나, 그 아픔을 다독이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구나, 아무 일도 없이 즐거운 날들도 많구나, 꿈에 나온 엄마를 꿈에서 깨 그리워한단 것이 숨길 일은 아니구나, 괜찮구나, 라는 것들을 알게된 것 아닐까, 싶다. 


기억력이 좋은 나의 오랜 건망증

아, 아까 네가 내 옆에 누워 몸을 뒤집으려 아둥바둥대는 모습을 보면서 아빠는 어릴 적 많이 봤던 만화가 떠올랐어. 네가 커서 그림을 보고 글을 읽을 수 있을 때가 되면,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봄이가 또 아빠가 되는 그런 날들에 보면 좋을 것 같아. 제목은 <아기와나> 라는 만화인데, 지금의 봄이처럼 걸음마도 떼지 못한 이라는 아기가 등장한단다. 신이는 진이라는 형이 있고, 아빠도 있고, 신이 또래의 친구들이 있고, 함께 사는 동네의 많은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단다. 


신이도 봄이처럼 많이 어려서 배고프면 울고, 졸리면 울고, 불편하면 울고, 불편하지 않아도 우는데, 그래도 가끔가끔 방긋방긋 웃을 때면 어찌 그리 귀여운지, 그래서 너를 보다 불현듯 어릴 적 만화에서 보던 신이 얼굴이 네 얼굴에 겹쳤나 싶어.

아빠는 사실 아빠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싶어. 어릴 적 이 만화를 보며 신이의 형 진이에게 많이 감정이입을 하기도 했지만, 두 아이의 아빠는 어떨까, 생각한 적도 많았거든. 봄이는 아직 동생이 없지만, 어찌됐던 아빠에겐 네가 생긴거니까. 


만화에서 신이진이의 엄마는 등장하지 않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거든. 아빠도 신이진이처럼 누군가와 이별한 적이 있는데, 워낙 어릴 때 일이어서 신이가 엄마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아빠도 기억을 하지 못한단다.


어떻게 생각하니. 기억한다는 것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어떤 차이가 있을까. 무엇이 낫진 않을테지만.


아빠는 오늘 아침 네가 첫 분유를 먹을 때 쯤 친구와 도봉산에 가서 네가 세번째 분유를 먹을 때쯤 집에 돌아왔어. 도봉산은 처음이었는데, 북한산이나 수락산과 달리 가파르고 중간중간 전망이 트인 곳이 없어 빠르게 올라가는 데만 집중했던 것 같아. 


아빠는 몇해 전부터 산에 가는 일이 잦은데, 산에 다니면서 체력과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아. 사실 네가 크면 너와 함께 산에 가는 것을 꿈꾸곤 하는데, 그 전까지 네게 어떤 산을 어떤 코스로 소개할 지 차근차근 기록하고 기억해두려고 해. 


오늘 아빠는 몸을 잘 풀지 않았는지 이전 때와 달리 무릎이 많이 아프네. 마음이 앞서면 나중에 꼭 탈이 나기 마련이더라. 물론 즐거운 일에 들뜨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말야. 그래도 아빠는 오늘이 나름 꽤 상쾌하고 뿌듯해. ♣


이번주 봄이는

뒤집을 듯 뒤집을 듯 하다, 만다. 뒤집을 때 도와줄까 싶다가 가만 두고 보는 편인데, 제 풀을 지쳐 찡얼찡얼하기 일쑤다. 이러다 쑥 뒤집으려나 싶은데, 아마도 내가 회사에 갔을 때 훅 뒤집을까 괜한 조바심이 든다. 일주일동안 잠깐잠깐 얼굴을 비출 뿐인데, 아빠 얼굴을 까먹지 않는 것이 감사하다. 손가락을 내밀면 무조건 잡으려 드는데, 악력이 꽤 쎄다. 기저귀를 갈 때 발버둥을 치는데, 명치에 킥을 맞으면 억 소리가 날 정도로 아프나 그 또한 대견하다. 곧 8킬로그램을 돌파할 기세다. 


이번주 엄마는

첫 아이인데 아이 보는 것이 프로처럼 느껴진다. 봄이가 본인 닮아간다고 자주 주장하는 편이나 근거가 미약한 편이다. 택배는 많이 줄어서 잔소리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 아기띠를 하고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다이어트도 성공적이어서 임신 전으로 돌아왔다. TV를 많이 보던 사람이었는데,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듣는 시간이 많아졌다. 봄이가 생기기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장면이다.


이번 주 아빠가 읽은 문장

영화는 <피노키오>라는 천연색 만화였다. 내 기분과는 달리 영화는 처음부터 화려하고 재미있었다. 나도 모르게 영화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는 연미복을 입고 한 손에 우산까지 든 작은 귀뚜라미가 고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네 마음이 진심으로 열망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다 이루어질 수가 있다. 

  별을 보며 네 소원을 말해보아라.

  네 운명이 네 꿈을 이루어줄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그 끝 장면의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극장 밖으로 나왔다. 밖은 완전히 깜깜했지만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은 보이지 않았고 갑자기 별보다 더 아름다운 함박눈이 온 세상에 내리고 있었다.

-마종기, 우리 얼마나 함께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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