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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Jul 18. 2020

장마를 기다리는 이유

열일곱번째 이야기, 2020년 7월 18일 토요일. 날씨 흐림.

정확하진 않다. 구십년대만 해도 한여름 장마철엔 강과 천이 범람했다. 간밤새 비가 억수로 쏟아진 다음날, 한강변에 나가보면 넘실대는 강물 위로 잔목이 떼를 이뤘고, 밥솥이며 돼지며 플라스틱 소쿠리 같은 것들이 엔딩크레딧마냥 소리없이 뒤를 따랐다. 어떤 재난은 그 자체로 풍경이 되어 철딱서니 없는 나와 친구들에겐 장관으로 여겨졌고, 냉장고가 등장하면 박수를 쳤다. 큰 비가 내린 다음날은 그랬다. 강변 풀숲 비린내가 진동을 하고 물길을 휩쓸고 다닌 슬리퍼가 미끌미끌하였다. 강둑 어귀에서 나와 함께 강을 바라보던 친구의 흠뻑젖은 머리칼은 기억하나 그 친구의 이름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장마를 기다리는 이유

아, 아빠가 어릴 적 육칠월이면 큰 비가 며칠동안 내리곤 했는데 사람들은 이 때를 장마철이라고 불렀어. 네가 처음 맞는 오늘의 칠월은 큰 비가 내리지는 않는구나. 텔레비전 뉴스가 끝날 때쯤 날씨를 알려주는 코너에선 빨강파랑색의 줄지은 선을 장마전선이라 칭했고, 그 선은 지도에서 아래 위로 오르내렸어. 그 선이 아빠가 사는 서울에 걸쳐 있으면 내일은 비가 온다는 뜻이었는데 얼마나 큰 비가 내릴 지 기대했던 여름밤 어떤 날이 아직도 기억나. 참 철이 없지. 큰 비가 오면 물난리가 나고 빗물이 안방까지 들어차 온종일 고생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말야.


아빠는 비가 올지 모르는 날, 아빠의 엄마가 쥐어준 우산을 땅에 끌고 다녔어. 별 생각없이 앞뒤로 우산을 땅에 질질 끌고 다니다가 돌뿌리에 걸리면 우산이 망가졌는데, 그땐 왠 심술이었는지 새 우산을 아낄 지 모르고 하루만에 망가뜨린 우산이 엄청나게 많았던 것 같아. 한 번은 외제차 로고가 그려진 검은색 장우산을 그렇게 망가뜨렸다가 아빠의 아빠에게 엄청나게 혼이 났던 날도 있었지. 아빠의 아빠가 지금의 아빠 정도 나이였을 시기일텐데, 그때 그 우산이 아빠의 아빠, 봄이의 할아버지가 아꼈던 우산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네가 어떤 날씨를 좋아할진 알 수 없지만, 일년에 한 번 오는 장마철은 지금의 아빠처럼 기억에 오래 남는 어떤 나날일거야. 봄이의 엄마는 비가 오면 김치전에 막걸리 타령을 자주하는데, 어쩌면 시간이 오래 지난 어느날의 장마철에 엄마의 김치전이 생각날 지 모르지. 엄마의 김치전이 생각나서 장마철에 김치전을 먹고, 또 오랜 시간이 지나 네가 먹던 김치전을 기억해 김치전을 해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땐 정말이지 오랜 시간이 지났을 때일 것 같아. 그때는 몇년 도 일까. 아빠는 네 곁에 있을까. 아무래도 오늘은 아빠가 엄마에게 김치전을 해달라고 졸라볼까 해. ♣


이번주 봄이는

회사 일과 저녁미팅으로 자는 모습을 본 게 거의 다 였던 한 주였다. 새벽에 잠이 깨 울음을 터트리면 아내가 봄이를 우리가 자는 침대에 눕혀 다독였는데 그 시간이 나와 봄이가 가장 가까운 거리, 가까운 시간이었다. 앞니 두개 양 옆으로 두개의 이빨이 모습을 드러냈고, 어제는 목욕을 시키다 귀에 물이 들어가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이번주 아내는

만사가 귀찮으니 주식이 아이스크림이 되어버려서 걱정이다. 피크닉을 좋아하여 봄이를 데리고 공원에 나가기도 하였으나 오락가락하는 장마철 와중 소나기에 밖에 많이 나가지 못하였던 것 같다. 비와 바람, 안개를 좋아하는 나와 달리 화창한 날씨를 좋아하는 아내에겐 이번 주 날씨는 그리 맘에 들지 않았을 터다. 그래서일까, 매일 맥주 두 캔을 드시고 계신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여기까지가 지금부터 시작하려는 내 이야기의 멍석이다. 초의 <시원기>나 단의 <단사>는 모두 제각각의 기록이다. 초와 단이 나하를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싸웠으므로 그 기록들은 서로 부딪친다. 게다가 단의 기록은 당대에 이루어졌으나 초의 일들은 후세에 문자로 옮겨졌으므로 두 건의 서물은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 나는 초원과 산맥에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들을 짜 맞추었다.

- 김훈, 달 너머로 달리는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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