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덟번째 이야기, 2020년 7월 26일 일요일. 날씨 맑음.
릿지(ridge). 바위 산등성이를 타고 내리는 산행을 일컫는다. 릿지 산행은 처음이었다. <서울등산학교>에서 진행하는 무료체험 프로그램이었는데, 초보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설렁설렁 따라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릿지의 정확한 뜻도, 산행을 진행하는 방식도 몰랐다. 허술하게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이런저런 산을 좀 타봤다고 거만했던거였다. 길이 끊긴 절벽에서 바위의 형태와 틈을 보고 한땀한땀 이동하는 릿지 산행은 등산로를 따라 걷는 등산과는 전혀 다른 스포츠였다. 사실 이제 처음이라 아는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여기서 저기를 어떻게 가라는걸까. 6시간 정도 진행된 릿지 산행에서 가장 많이 든 생각이었다. 아래론 낭떠러지고 손으로 잡을 곳도 발끝을 디딜 곳도 없어보이는데 길이라고 했다. 강사님은 자세히 보면 집을 곳이 있고 디딜 곳도 있다고 했다. 유일한 안내였다. 용기를 못내 한두사람을 먼저 보내고, 그들이 어디를 어떻게 잡고 디디는질 보면서 조금씩 마음을 다잡았다. 절벽의 바위에 매달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잡을 곳이 있고 디딜 곳이 있을거라 믿는 것 뿐이었다.
봄아. 어제 아침 하늘은 아빠가 올해 들어 만난 하늘 중 가장 맑고 푸른 날이었어. 몇 주전부터 아빠는 친구와 산에 가기로 약속을 해두었던터라 오늘의 하늘이 얼마나 반갑고 예쁘던지. 만나기로 한 장소까지 차를 타고 가는 와중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어. 이런 하늘이라니, 혼잣말을 하면서 말야. 한주 내내 장마가 져 비가 왔던 터라 아침해를 받은 북한산의 바위가 뽀얗게 빛나 더욱 단단하고 든든해 보였어.
이날 산행은 이전과 달리 장비를 착용하고 바위를 타고 넘는 릿지 산행이었어. 듣고 보긴 했어도 실제로는 한번도 해보지 않은터라 걱정도 됐지만, 자주 산을 다녀서였을까, 어찌어찌 하다보면 될거라고 생각한 것 같아. 방심한 거지. 산에서 까불면 크게 다친다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었건만. 처음 하는 릿지 산행에 신이 났던 것인지, 산에선 뭘 못한다 말하기 싫었던 것인지, 아무튼 준비없이 나섰다가 큰 코 다쳤어.
모든 구간마다 긴장을 놓을 수 없을 정도로 겁이나고 힘이 들었어. 한번은 미끄러져 줄에 대롱대롱 매달렸고 그 덕에 옷이 찢어지고 팔과 다리에 상처를 입었어. 요즘 말론 멘붕이라 말하는데, 일종의 패닉(panic)이 오기도 했지. 네가 보기엔 아빠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세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겠지만, 아빠는 겁이 많은 편이고 마음이 약하다는 이야기도 꽤 듣는 편이란다. 산에서의 경험은 친구들보단 많아 자신이 있었지만, 자신감과 자만심은 큰 차이가 있단 것을 아빠도 오랜만에 깨닫게 됐어.
아빠가 간 코스는 북한산 만경대를 아우르는 길이었어. 그 코스의 마지막 쯤 '피아노 바위'라는 곳이 있었는데, 별로 피아노 건반을 닮은 것 같지는 않더라. 피아노고 뭐고 저길 어떻게 건너갈지 눈앞이 캄캄했어.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였고 양 손으로 바위를 집는다 해도 발을 디딜 곳이 없으면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이 될 것 같았거든.
그곳에는 봄이의 할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신 강사님이 계셨는데, 강사님은 아빠보고 자세히 봐야한다고 하셨어. 자세히 보면 잡을 곳이 있고, 디딜 곳이 있다고 말야. 아무리봐도 그렇지 않은 것 같은데, 평온한 표정으로 그렇다고 하시니 자세히 볼 수 밖에 없었어. 한 분, 한 분, 아빠보다 앞서 그곳을 건너는 모습을 관찰하면서 그제서야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 심장이 덜컹덜컹 거렸지만 어찌됐던 순간순간 바위를 집고 딛어 바위를 건넜어.
이제 딱 한번 뵌, 어쩌면 여러번 뵈게 될 강사님의 말씀 한마디가 오래 남을 것 같아. 절벽에 매달려 있을지라도, 조금은 용기를 낼 수 있을 것만 같아. ♣
이번주 봄이는
부쩍 크는 시기인지 일주일이면 몰라보게 달라진다. 엎드려 기던 봄이는 앉아 있는 시간이 많아졌고, 버둥대다 뒤로 쿵 넘어진다. 가드를 설치해놓았는데 가드를 잡고 일어나 꽤 오랜시간 서 있는다. 기어가는 속도도 빨라져 1분도 눈을 떼기 어렵다고 한다. 봄이는 칭얼대거나 울음이 긴 편이 아닌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짜증을 내기도 한다. 본인의 감정표현을 슬슬 시작하는 느낌이다.
이번주 아내는
비가 많이와 밖에 나가지 못하다가 맑은 하늘을 보면 감탄을 넘어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예전에 비하면 체력이 좋아져 이런저런 집안일이 엄청 많은데 볼멘소리를 별로 하지 않는다. 봄이도 크지만 아내도 돌아보면 몰라보게 달라졌다. 요즘 부쩍 나를 가엽게 여기셔서 가끔 머리를 쓰다듬기도 한다. 아마도 나와 봄이를 세트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잘 지내셨는지요? 오랜만의 기별입니다. 눈 드물던 겨울과 입 다문 봄 지나 벌써 뜨거운 여름이네요. 예년과 다른 여름입니다. 말 배우는 아이처럼, 우린 또 배워나갈 겁니다. 여름의 끝까지, 지치시지 말기를 바라며...
- 2020 여름 김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