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토토 Aug 01. 2020

당신이 내게 심은 나무

열아홉번째 이야기, 020년 8월 1일 토요일. 날씨 비.

서점에 가면 소설과 시집을 한데 모은 문학 코너에서 서성거렸다. 소설은 좀 나은 편이지만 시집 매대는 해가 갈수록 좁아졌고 구석으로 밀렸다. 시집을 집어 들고 한 작품, 두 작품 읽어보다 내려놓으면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시집 속 자음과 모음과 단어와 문장이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쳐 황급히 시선을 피할 때와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럴 때면 여지없이 시집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향하곤 했다. 시집은 수명이 길다. 구매 당일 펼쳐보고 책장에 꽂아두면 오랜 시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몇년을 버틴다. 비싸고 무거운 가전제품이 구닥다리 폐품이 돼 버려지는 와중에도 꿋꿋히 살아남아 내 곁을 서성거린다. 종이는 바래도 활자는 낡지 않아 제 나이를 먹으며 오래 산다.


당신이 내게 심은 나무

아. 사람들은 종이에 글자를 적어 모은 것을 책이라 말하고, 글자가 모여 이룬 문장들의 구성에 따라 책의 종류를 가른단다. 서점에 가면 이런 저런 종류의 책이 많은데 아빠는 보통 소설과 시집이 모여있는 곳을 주로 찾곤 해.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다가서지. 물론 눈에 들어오는 제목을 단 책들을 들춰보기도 해. 이런저런 책을 들춰보다 가끔은 한 곳에 오래 서서 여러 장을 읽게 되는 경우도 있었어. 돌아보면 흔치 않은 순간이었던 것 같아. 그래서 아빠는 서점에 가나봐.

너와 함께 서점에 간 적도 있었어. 너를 안고 서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네가 태어나기 이전에 서점을 돌아다닌 방식대로 무심한 척 매대에 놓인 책을 훑었지. 몇몇 꼬마들은 서점을 뛰다니며 이거 살래요, 저거 살래요, 참새처럼 짹짹대기도 하였는데, 할아버지가 아빠를 서점에 데려갔던 이전 어떤 날이 불쑥 떠오르기도 하더구나. 할아버지는 서점을 좋아하셨는데 집에 쌓인 책들이 어쩌면 아빠의 취향을 만들었을지도 몰라. 하나 다른 건 시(詩), 할아버지는 시를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아.


아빠가 처음 시가 좋다, 생각한 건 재수학원 강의실이었어. 백석의 시가 지문으로 나오는 문제를 푸는 와중이었지. 멍하니 한 문장, 한 문장을 따라 읽는데 마지막 문장 즈음 마음이 뭉클해져서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고 문제집을 덮어 버렸어. 겁이 났던 것이었을까.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몰라 당황했던 기억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시를 읽은 기억이 어우러져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순간으로 남았어. 그 시의 마지막에 <갈매나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아빠의 마음에 그 순간 한 그루의 갈매나무가 심어진 건 아니었을까 싶어. ♣


이번주 봄이는

침대에서 한번 떨어진 이후 바닥에서 재우는데 잠자리가 넓어져서 그런지 자다가 이러저리 굴러다니다가 잠이깨 우는 날이 많았고, 아내는 잠을 거의 잘 수 없었다. 쇼파에 손을 얹어 번쩍 일어서서는 쇼파 위로 올라가려 용을 쓰지만, 아직은 서있는게 최선이다. 뒤로 넘어져 뒤통수를 바닥에 부딪치면 울까말까 눈치를 보다 눈이 마주치면 운다. 자다 깨 자고 있는 봄이를 보면 얘가 누군가, 싶기도 하다.


이번주 아내는

아이를 낳은 이후 세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힘들어 보이는 한 주 였다. 평소 늦잠자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자다깨다를 반복하니 본인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대처가 안되는 모습이다. 장마가 길어져 밖에 나갈 수도 없는데다 봄이의 낮잠 시간은 점점 짧아지는 추세라 휴식시간도 줄어들고 있다. 전쟁으로 치면 조금씩 전세가 기우는 모습이라 말할 수 있다. 전세를 뒤엎을 묘책이 있을까 싶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육아는 날이 갈수록 힘든거라 하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긴 하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를 전하는 동안에도 날씨는 어딘가로 가고 있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 임솔아,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전문.



이전 18화 절벽에 매달려 있을지라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