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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Aug 16. 2020

사실은 지금도 만화가 좋아서

스물한번째 이야기, 2020년 8월 16일 일요일. 날씨 폭염.

이십여년 전 쯤에는 만화를 빌려주는 곳이 있었다. 비디오 가게처럼 만화를 빌려주는 곳이었는데 이제는 둘다 사라져버린 지 오래다. 그때 당시 만화방은 요즘의 만화 카페로 변모하기 이전이어서 만화방을 꺼리는 사람들이 만화 대여점을 많이 찾았다. 혼자 방에 누워 몇십권씩 쌓아놓고 과자를 준비하면 마음이 꽤 넉넉해졌다. 비가 오는 날은 만화를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서 다섯 시간, 여섯 시간 몰아 보기도 했다. 용돈이 많지 않아 함께 살던 친할머니의 지갑을 털거나 공병을 주워 팔아 만화 빌릴 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온다. 그때 나는 만화에 꽤 의지했던 것 같다. 만화는 약하고 어수룩한 나를 수없이 꾸짖고 다독였다. 어떤 때는 아프면 병원이든 약국이든 찾는 것처럼 만화방을 전전하기도 했다. 볼 만한 만화가 없을 때는 내 자신이 꽤 한심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만화에 과도하게 기댄 탓일 거다. 그리고 그런 시절이 지났다. 동네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진 것처럼 만화방과 대여점이 자취를 감췄다. 나도 더이상 만화에 의지하지 않는다. 이제는 그저 잘 아는 친구를 대하듯 만화를 본다. 허허, 좋은 이야기네, 자 마시자. 뭐 이런 대화를 하는 식이다. 주인공에게 말을 걸 때도 있고 작가에게 말을 걸 때도 있다.


사실은 지금도 만화가 좋아서

봄아. 이제는 완연한 여름인가봐. 오랜 비가 그치고 대낮의 열기가 후끈거리니 자취를 감췄던 숫매미의 울음이 돌아온 듯 해. 아빠는 여름이라 말하면 오래 전의 여름, 그러니까 여름이 더운 줄 모르고 뛰다녔던 어린 날의 여름이 떠오른단다. 수박이 비싸지 않았던 몇십년 전 쯤 아빠는 아빠의 동생들과 수박 한통을 한자리서 비웠었단다.


여름방학은 꽤나 길었어. 팔월 이맘 때 대부분의 친구들은 가족들과 휴가를 떠났고, 휴가를 갈 수 없는 친구끼리 동네를 쏘다니며 할 일을 찾았어. 아빠는 돈이 있는 날에는 만화방에 가고 돈이 좀 부족하면 만화 대여점에 가서 만화를 빌렸어. 두어권만 빌려도 나른했던 오후가 든든해졌지. 라면이나 국수를 끓여 만화 볼 채비를 단단히 하고 한장 한장 모든 그림과 대사를 음식보다 곱씹으며 만화를 봤어.


그리곤 몇십년이 흘렀네. 하지만 아빠는 지금도 가끔은 만화를 봐. 아빠의 책장엔 엄마와의 결혼식을 앞둔 날에 보았던 <결혼식 전날>이란 만화가 있고, 아빠가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꺼내보던 <커피 시간>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어. 아다치 미츠루의 <H2>나 다카하시 신의 <좋은사람>, 다니구치 지로의 단편집들은 아빠가 늙어서도 오래도록 보게 될 것 같아.


만화는 아빠의 이전, 아빠가 좋아하는 아빠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주는 것 같아. 아빠가 어떤 것을 좋아했고 즐거워했었는지 말야. 그래서인지 아빠는 여전히 만화가 좋아. 네가 커서 걸어다닐 시절에도 여전히 만화가, 그리고 만화방이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다면 하루는 엄마 몰래 만화방에 가도록 하자. ♣


이번주 봄이는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잠을 잔다. 간밤의 칭얼거림은 다소 줄었다. 이빨이 나느라 그랬나보다. 이케아 매트리스를 사서 우리 침대 옆에 붙였다. 단차가 없어 쉽게 침대와 침대를 오가며 잔다. 세 가족이 정말 이러저리 왔다갔다 하며 한 공간에서 자게 되었다. 분유는 음료수를 먹듯 몇 분만에 마셔버리고 이유식도 제법 잘 먹는 것 같다. 가드를 잡고 일어나 아주 오래 서 있을 수 있는데 몇 초 간 서 있기도 한다. 일어섰다 앉는 것도 터득했다. 


이번주 아내는

봄이가 잠을 잘자면 아내의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을 옆에서도 느낀다. 장마가 슬슬 끝나가는 조짐을 보여 기분도 전 주보단 나아보인다. 봄이가 태어나기 전 함께 떠난 여름날의 호이안이 떠올랐는데, 그때처럼 휴가를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맥주를 사러 갔었던 어느 시골길이 그립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삶을 넉넉하게 만드는 것은 소유와 축적이 아니라 희망과 노력이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성공할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버몬트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일을 다시 한 번 실천할 생각이 있다. 그 때는 단순히 우리 두 사람이 먹고 사는 일 뿐 아니라 사회가 두루 함께 잘 사는 길을 찾으려고 애써 보리라.

- 헬렌 니어링-스코트 니어링, 조화로운 삶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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