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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토 Sep 20. 2020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스물여섯번째 이야기, 2020년 9월 20일 일요일. 날씨 맑음.

더위가 가시고 서늘한 바람이 부는 오후를 맞아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나섰다. 너른 벤치 하나와 열댓 그루의 살구나무가 자리한 곳에 앉아 아내는 아이에게 메론을 먹였다. 나는 아내와 아이 주변에 빙긋이 서서 아이를 보았다가 하늘을 보았다가 주변을 보았다가 중간중간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뜨기도 했다. 사람은 많았으나 모두가 조용하여 목화솜 같은 구름 사이사이로 갈래를 튼 주홍볕에 눈길을 오래 두었다. 그날의 풍경 아래 나의 마음은 잠시간 쓸쓸하기도 하였는데, 지금 이 순간은 말뜻 대로 찰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슴 벅찬 풍경과 분에 겨운 행복은 풍선처럼 부풀었다 무거운 돌덩이가 되기도 한다. 나는 서둘러 아내와 아이에게 돌아가 부풀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마음으로 아이의 이름을 불러보았다. 


오늘을 기억하지 못할 지라도

아. 이번주는 우리 세 가족이 처음으로 집을 떠나 밖에서 이틀밤을 보냈었단다. 매일 밥을 먹고 잠을 청한 지금의 집이 아닌 산 속에 자리한 자그마한 공간에서 바람을 쐬고 모닥불을 피웠어. 사람들은 불을 떼고 멍하니 바라보는 일을 줄여 불멍이라 부른단다. 멍하니 불을 보고 있으면 이유없이 마음이 노곤노곤해지고 때론 말랑해져서는 오래 전의 어느 날과 잊고 있던 무언가가 떠오르곤 해.


우리의 첫 휴가이자 여행이었던 지난 몇일은 아마 너는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아. 아빠도 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도 지금의 시기는 기억하지 못하거든. 하지만 반대로 너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엄마와 아빠는 오래도록 기억할 순간일 것 같아. 그것은 어쩌면 오랜만에 만난 낯선 공간 때문일 수도 있고, 참나무 토막에서 피어오른 불꽃과 연기의 자취 때문일 수도 있을거야. 


네가 밤잠에 들어 비로소 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을 때 엄마는 오래전 너를 갖기 이전의 모습으로 잠시 돌아간 것 같았단다. 엄마와 아빠는 매년 봄과 가을녁이 되면 어디론가 떠나곤 했는데 오랜만에 그때의 엄마 모습을 만난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어. 오로지 단 둘이 돼 캄캄한 밤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가고 음악을 듣는 몇 시간이 우리에겐 휴가였을지 몰라.


아빠는 네가 자라 의자에 앉게 되면, 스스로 잠을 잘 수 있게 될 때 쯤이면 너와 함께 불을 피우리라 생각했단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을 구분하고, 엄마와 아빠를 제 입으로 부를 수 있을 때가 오면 우리 세 가족이 다같이 모여 모닥불을 피워보도록 하자. 어쩌면 그때는 기억할 수 있을지 몰라. 불꽃과 연기가 하늘 위로 일렁이는 깊은 밤의 정취를. ♣


이번주 봄이는

엄마, 맘마, 아빠라고 세 단어를 비교적 정확하게 말할 수 있게 됐다. 엄마라는 단어는 엄마를 찾고자 할 때 쓰는 것으로 보이지만, 맘마와 아빠는 어떤 동기를 가지고 발음하는 지는 알 수 없다. 어찌되었던 듣는 이로 하여금 단어라고 인식되는 것은 현재로선 이 세단어다.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식사와 엄마, 그리고 아빠라는 단어를 가장 먼저 익히고 발음하는 일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주 아내는

지난해 말 아이를 낳고 9개월여 만에 처음으로 밖에 나가 잠을 자게 되었다. 세가족이 다같이 떠난 여행이라 숙소에서도 아이를 봐야 하는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바람을 쐰다는 측면에서 꽤 해방감을 느끼는 듯 보였다. 서울에서 한 시간, 한 시간 반 쯤이면 도착하는 홍천과 원주 등지를 돌아다녔는데 아이를 재우고 모닥불 앞에 앉은 불멍의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휴가를 왔구나, 싶었고 아내도 조금은 안락해 보였다. 단풍이 찬란하여 겨울 문턱에 다가서면 한번 더 가고 싶은 곳이었다.


이번주 아빠가 읽은 문장

왜냐하면 나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 쪽에 더 가까우니까. 이 모든 생고생이 내게 없는 것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라 나의 장점, 내가 사랑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다는 걸 아는 순간, 구멍에 불과했던 단순한 욕망은 아름다운 고리의 모양을 지닌 복잡한 동기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것이 이 인생을 이끌 때, 이야기는 정교해지고 깊어진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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