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한주소회 13화

기다림의 미학

전화를 받기 싫은 순간들이 생겼을 때

by 염미희


사무실 담당들마다 울리는 벨소리가 다르다. 예를 들면 무거운 벨소리 둥둥둥둥, 과장님 벨소리다. 과장님이 안 계신다? 내가 받는다. 경쾌한 새소리 같은 벨소리는 옆 자리 주무관님 소리. 안 계실 때마다 소리가 파티션을 타고 귀에 꽂힌다. 그 벨소리가 사람의 목소리였으면 딕션 하나는 끝내줬을 것이다. 벨소리는 가끔 소음이 되기 때문에 빨리 당긴다. 대신 받았습니다, 누구누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전화받을 때 응대법이다. 근 10년을 이렇게 받았다. 우리 사무실 자리 비울 때는 전화를 돌려놓고 가시지요,라고 말을 한다. 가끔 회의를 할 때면 막내병사는 사무실 전화를 당기는 가장 중요한 업무를 한다. 가끔 병사가 이건 병사가 하는 일입니다,라고 할 때가 있다. 그런 게 어딨냐 같이 하는 거지. 하면 아무 말 없이 따라와서 일을 한다.


나는 첫 사회생활을 할 때 전화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한 선배가 전화를 되게 자주 하셨다. 무슨무슨과 누구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하고 전화를 받으니 상대방은 어 나 누구누군데,라고 말을 한다. 아, 필승! 선배님이라고 대답을 하니, 아필승? 아필승이 뭐냐? 하고 전화를 뚝 끊었다. 다시 전화가 왔다. 아, 필승! 선배님 아필승? 얘 진짜 안 되겠네.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시 전화가 왔다. 피필승 선배님 죄송합니다 전화받았습니다. 피필승? 웃는다. 너 진짜 안 되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사무실 사람들은 괴롭힘을 당하는 것 같다며 나를 위로했다. 위로가 되진 않았다. 전화를 받는 순간, 그 사람과 나. 이 세상이 그 둘만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에. 나는 그 전화를 연달아 받고 나서 말을 더듬는 버릇이 생겼다. 전화를 하다가 조금만 긴장이 되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는 상황. 발신자의 번호가 뜨는 내 사무실 전화 스크린에 그 사람의 번호가 뜨면 주먹을 한번 꽉 쥐고 심호흡을 크게 하고, 떨지 말자, 긴장하지 말자, 더듬지 말자. 앞에 어떠한 추임새도 넣지 말고 필승이라고 대답하자. 내 모니터 아래에 써놓은 포스트잇 대본만 읽자 늘 다짐했다. 그렇게 일 년을 하고 예뻐해 주는 윗분들과 동료들이 생겨나자 말을 더듬는 버릇이 사라졌다.


나는 사실 말을 못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락부장과 체육부장을 하면서 웃기게 말한다는 이야기는 숱하게 들어왔었고, 후보생 때는 방송반도 해봤다. 말하는 것을 너무 좋아하고 또 재밌게 한다고 해서 행군하는 기간에는 별명이 라디오였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어디 가서 말싸움으로 진 적은 없었다. 주먹싸움은 해본 적 없지만 이것도 지진 않았을 것 같다(뭔데..) 그렇게 말을 더듬었던 기억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거짓말 말라고 말한다. 거짓말 같던 그 기억 덕분에 이제 갓 들어온 막내들에게 전화를 할 때마다 유난히 친절하게 전화를 해주려고 노력한다. 나는 그때 받았던 전화 때문에 전화를 받을 때마다 땀이 줄줄 났으니까. 그때 이후로 나는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으며 어리숙한 상대방을 기다려주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한다.


아필승이 뭐냐면서 꼬투리를 잡고 무서워서 말을 더듬으니 피필승? 이라면서 전화기를 무서운 정도로 세게 내려치고는 전화를 다시 걸지 않았던 그 선배. 그런 말을 듣고 다시 전화를 걸어야 할지 내려가서 죄송하다고 말씀을 드려야 할지 그 자리에서 전화를 기다려야 할지 모든 순간이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그냥 아, 필승이 맘에 안 들었는지 무서워서 말을 더듬는 내가 싫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선배가 그렇게 전화를 끊어버리고 나서는 그 선배가 나에게 왜 전화를 했는지, 무슨 용건으로 전화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화기 선을 타고 흐르는 침묵과 한숨과 진짜 안 되겠네? 하면서 내려치듯 전화를 끊는 그 순간만 기억이 난다. 사실 지금도.


그 사람은 그 이후 다른 후배들과 하급자에게 폭언을 했다는 이유로 신고를 당했다.


진짜 훌륭한 지도자들은 사람의 성향에 맞춰서 가르치는 방법을 달리한다. 상대방이 주눅이 들었으면 적절한 위로를 하며 자존감을 올려주고, 상대방이 너무 자만하고 있으면 살짝 구부러질 수 있게, 꺾이지는 않도록 조언을 한다. 완벽한 필승법은 없다. 뭐 MBTI와 유전자와 배경과 기타 등등까지 비교하며 언제나 정량적으로 지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 경험이 적으면 정량적인 경험을 공유해 주고, 경험은 충분하지만 마음에 문제가 있다면 정성적인 방법을 찾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다그친다고 모든 사람들이 잘했다면 나도 박찬호고 나도 박세리고 나도 김연아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사람마다 적절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상대방이 조금 어리숙하면 그것대로 좀 기다려주고. 못 하겠다고 하면 같이 좀 해주고, 알려주다가 진짜 못 하면 조금 더 알려주고 배울 의지가 없으면 그때 혼내도 늦지 않는다. 나는 나도 못 했던 때를 자주 기억한다. 막막한 상황들 속에서도 잘 알려주던 선배들이 있어서 그래도 10년 차, 무사히 하루하루를 끝낸다. 가끔은 이 업무가 처음이라 저도 좀 알아보고 있습니다.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라고 했을 때 아니 안 되는데?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배워서라도 알려준다고 해주니 고맙지, 라든지, 급한 건 아니니까 확인하면 알려줘요~라고 대답을 해주신다. 내가 바라는 모습들이 넘쳐나는 순간들이다. 고마워요, 수고 많아요. 고생 많네요. 하며 조심스럽게 끊는 전화들까지.


며칠 전 처음 해본 업무가 있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죄송합니다. 이 업무가 처음이라 저도 알아보고 답변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응대를 했는데 결국 일을 잘 끝냈다. 사무실에 있니? 물으시고는 딸기 두 박스를 들고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오늘 장날인데 딸기가 맛있어 보여서 사 왔다고. 사무실원들이랑 맛있게 나눠먹었다. 주무관님이랑 사이좋게 딸기를 씻어 사무실원들과 나눠먹었다. 업무가 잘 끝나서 기분이 좋으셨는지, 딸기가 진짜 너무 맛있어 보여서 우리 사무 실 거까지 사 와주셨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는 내가 기분 좋은 대로 해석하기로 했다. 유난히 달았던 하루의 끝. 딸기가 달았다, 로 시작됐던 그날의 일기는 일이 힘들었을 때 어려웠을 때 벨이 울리는 순간부터 땀을 줄줄 내던 막내 때의 기억까지 불러왔다. 상대에게 달콤한 하루를 만들어주든, 평생의 트라우마를 만들어주든 그건 당신의 몫이다. 적어도 나는, 하루의 맛이 심심하더라도 하루하루 잘 버텨나갈 수 있게 좋은 말 한마디라도 '굳이' 해주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굳이 기다려주고, 굳이 친절한 사람이 되길 바라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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