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한주소회 15화

신포도에 대하여

신포도 기제를 아세요?

by 염미희

신포도 기제를 아시나요?


한 이솝우화에서는 여우가 안간힘을 다해 포도를 따먹으려고 노력한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여우의 노력이 포도에게까지 다다르지 않자 여우는 저거 딱 와꾸보니까 신포도네 맛없겠네 라며 단념하고 돌아간다. 과일집 딸로 산 지 30년이 넘었어도 포도의 모습만 보고 시겠다! 달겠는데?라고 판단하기 어렵다. 여우는 갖지 못한 것을 깎아내리면서 내가 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합리화를 한다. 심리학 용어로 '신포도 기제'


며칠 전 전역을 앞둔, 전역한, 전역을 하고 싶은, 난 우선 괜찮은데? 하는 사람들과 밥을 먹었다. 그러다가 고백공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 사람은 동기모임에서 고백공격을 받았다. 우리는 그를 가해자라고 말했다. 그 가해자는 동기 모임에 우연히 들렀던 선배. 오랫동안 그 친구를 좋아했다면서 공개고백을 했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나 걔를 좋아하는데 곧 전역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답답해 고백해 봐! 의 알고리즘을 타고 몇 번 본 적이 없는 선배가 고백을 하러 무려 '동기모임'까지 와서 고백을 하고 간 것이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선배의 이름을 기억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으나 아 그 동기모임에서 좀 이상한 선배에게 고백받은 애?로 남아있는 그녀. 나는 그걸 듣고 진짜 끔찍하다고 말했다. 근데 그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그 말을 했다. 어떤 라포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으면 차라리 좀 더 친해진 이후에, 담백하게 말을 하는 게 좋은데 굳이 왜 고백 공격을 하고 난 이후에 그걸 상대방이 받아주지 않으면 상대방도 같이 깎아내리는지를 모르겠다고.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 적었듯 나에게 매번 살이 쪘다고 하는 선배가 거슬려서 선배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거울 안 깨요? 나였으면 아침마다 거울보고 열받아서 거울 깰 거 같은데 했었던 때가 있다. 그때 선배는 나에 대해 말했던 것은 까맣게 잊은 듯, 나에게는 싹수없는 후배년이라고 했고 나는 선배가 못생겨서 그런가 보다 하고 합리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멀쩡한 사람에게 먼저 슬슬 긁거나 고백공격을 한 사람들이 비난을 받고 욕을 먹는 게 당연한 일인데 왜 고백도 안 받아줘, 안 만나줘 하며 주변에서 더 시끄럽게 하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한 친구는 사회에서 만연했던 성비위 문제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신고를 하는 순간부터 피해자는 행동에 대해서 제한을 받는다. 그리고 이곳저곳에서 그의 행실에 대해서 말을 한다. 내가 같이 근무해 봐서 아는데 걔 좀 쓸데없이 친절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걔 사람들 자주 만나잖아 그럴 만하지 않아? 라며 피해자에 대해 평가를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완벽한 이방인이 된다. 가해자에 대한 이야기는 뒷전이다. 동료를 동료로 보지 않고 이성으로 보는 사회에서 얼마큼을 견디느냐가 이 생활을 오래 지속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결정하는 요소가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공개적인 고백을 받은 적도 있고 상대방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흘렸고, 주변 사람들이 자꾸 엮어주려고 하던 때도 있었다. 스토킹도 당해본 적이 있고 20살이 넘는 아저씨에게 네가 여자로 보인다는 빻은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때마다 수치심을 느끼기도 했고 절망스러웠다. 일을 해야 하는 곳에서 나이와 상대방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고 고백을 하고 좋아한다는 소리를 흘리면서 힘들게 하던 사람들. 불편하다고 내색을 하면 너는 좋아하는 마음을 왜 무시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그때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고백은 용기가 아니라 폭력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러 번 고백을 했던 동기에게는 너 이거 좋아하는 거 아니야. 싫다는데도 네 마음이 중요하다고 니 마음을 자꾸 내보이는 거? 폭력이야, 알아? 이렇게 대답해 주었고 초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던 20살 많은 아저씨에게는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불편합니다 하고 카톡을 보냈다. 다음 날 상대방은 카톡을 탈퇴했다. 겪지도 않은 일들에 대해서 본인들이 편한 방향으로 생각할 때마다 힘들었다. 좋아한다고 하면 고마워해야 하고 선물을 주면 그냥 받으면 되는 건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냐는 이야기들이, 받을 수 없는 마음을 전달받은 사람들을 고립시키게 만든다. 선물을 거절하면 너는 상대방 마음도 거절하는 나쁜 년이라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고백을 거절하고 난 이후에는 그 이야기들이 서동요 기법으로 흘러들어 가 고백을 했는데 꼴에 눈이 높아서 거절을 했다는 둥, 고백한 사람 용기도 몰라주는 사람이라는 둥의 이야기를 할 때. 예전에는 열 번 찍어서 안 넘어가는 나무가 없다고 이야기를 했다. 열 번 찍은 나무에게 남은 생채기는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상한 집착을 하던 사람이 있었다. 나의 일과시간을 감시하고 나의 다이어리도 몰래보고, 내가 인사만 하고 말을 더 섞지 않으니 유서를 쓰고 사라졌던 사람. 유서에는 후배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내용을 적어놨다. 사람들은 왜 그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지 않았냐고 물었다. 의미 없는 호의는 상대방을 헷갈리게 만드는 걸 알고 있어, 나는 내 나름대로의 선을 그었다. 퇴근하고 나서의 약속은 좀 어렵다고 선을 긋기. 자꾸 도와주려고 할 때 괜찮습니다, 공손하게 이야기하기. 그 선을 그었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방이 자살을 하겠다는 둥 유서를 쓰고 사라졌고 그 유서 속 후배가 가해자가 된 상황. 여전히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가끔 모든 것이 꿈이었으면 좋았겠다, 그런 생각을 한다. 아니면 내가 진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가끔 남아있는 카톡과 자주 죽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때의 카톡을 돌려보면서 언제쯤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생각한다.


나는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내 것이 되지 못하니 너는 신포도로 남아있길 바란다는 그 나쁜 마음들을 곱게 썼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 안 만나주냐며 상대방을 갖지 못하면 죽이려는 사람들을 보면서 요즘 세상에서 통용되는 사랑의 정의가 소유로 귀결되는 상황이 아닌지, 내가 진짜 사랑한다면 집착과 소유를 통해서 상대방의 현재를 깎아내리고 미래를 가둬버리기보다는, 그 사람이 날개를 달고 더 높은 곳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돕는 정도의 지지 정도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좋아했지만 갖지 못했던 사람들에 대해서 깎아내리는 행동은 자신의 안목도 볼품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한 때 좋아했으면 그냥 지지하고 응원해 주는 정도로 남아있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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