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오래 된 기억에서 이 이야기를 끄집어내게 된 건 어떤 친구 덕분이었어. 장깨. 목욕탕 길 건너 중국집 배달부였던 동갑 친구. 그와 올봄에 연락이 된 거야. 삼십오 년 만이었지. 몇 년 전에 내가 책을 낸 적이 있거든. 그 책에 목욕탕에서 일한 이야기가 조금 나와. 세상 참 좁지? 장깨가 그 책을 본 거야. 오랜 세월 뒤에 만나서였을까, 처음엔 그를 못 알아봤어. 산처럼 덩치가 커 보이던 그였는데 막상 보니 통통하게 변했더라고. 그도 얼굴이 허옇게 떴던 나를 지금 모습과 일치시키지 못했어. 정말 니가 그 목욕탕 뽀이 맞냐고. 정말 니가 장깨 맞냐고 한참 묻고 나니 툭하면 병신이라고 나를 타박하던 목소리톤과 통통함 뒤에 감춰져 있던 날렵한 어깨가 눈에 들어왔어. 그는 그 동네에서 오래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일 뿐 아니라 사람들의 뒷이야기도 기억하고 있었어. 열일곱 살이던 그와 내가 저항 한 번 못하고 감당하며 살아야 했던 그
시절 이야기를 나누며 몇 번이고 눈물이 났어. 그의 기억 속 나는 내가 느끼던 것보다 더 힘들고 불쌍한 아이였어. 내가 훌쩍거리면 그가 웃었어.
"아이고, 이 사람아. 자넨 옛날에도 툭하면 눈물이더니... 오십 넘어서도 여전하시네."
원래는 오전에 만나 가볍게 커피나 한 잔 하고 헤어지거나 길어진다 싶으면 밥이나 같이 먹고 다른 일을 보려고 일정을 마련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어. 그가 먼저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말했어. '야, 씨팔. 우리 어디 가서 한 잔 빨면서 묵은 얘기나 하자.' 나도 보탰어. '그래, 씨팔. 담배도 피우고 침도 뱉고.' 비로소 웃음이 터졌어.
우린 근처 술집으로 들어갔지. 그렇게 시작된 낮술은 밤늦게까지 이어졌어. 그를 만나고 돌아와 며칠은 꽤 힘들었어. 내가 여럿으로 쪼개지는 느낌이었거든. 나의 대부분이 어디론가 달아나 버리고 열일곱 살의 나만 남아 뒷골목에 웅크리고 있는 것 같은 거야. 생각 안 하려고 해도 자꾸 떠오르는 거야. 나만 그런가 싶어서 장깨에게 전화를 했더니 걔도 그렇대. 이상하게 그때만 생각하면 기분이 울적해진다는 거야. 우리가 어려서 그랬는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목욕탕의 미끄덩한 바닥과 싸구려 스킨 냄새를, 장깨는 중국집 낡은 배달 자전거를 아직 떼어내지 못하는지도 몰라. 무엇이 우리를 그때로 잡아끌었을까. 성장하는 내내 겪은 다른 좋은 기억들은 다 밀어내고 순식간에 내 의식 맨 꼭대기를 차지해버린 목욕탕 기억. 피하거나 잊는다고 없던 일이 될 수 없는 기억. 그게 꽤 아팠나봐. 그래서 생각했어. 오래된 사진을 꾸미지 않고 액자에 넣듯 그때의 이야기를 다 끄집어내야겠다고. 윤색이나 미화된 기억이 아닌, 날 것으로. 그곳을 벗어나면서 휘발되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는 그 시간들을. 내 눈 앞에 다시 늘어놓고, 대체 그 시절 내 삶을 떠밀어 갔던 힘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어. 다행히 나 보다 선명한 기억력을 지닌 장깨 덕분에 어렵지 않았어. 그의 기억 속에 내 기억을 영화의 페이드 인 클립처럼 삽입하자 막연하게 흑백으로 떠돌던 시간들이 천연색을 띠고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어. 그 안에 열일곱의 나를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나의 기억과 장깨의 기억이 꽤 다른 것에도 놀랐어. 기억하기 싫은 걸 마음 뒤편 깊숙이 감춰두고 좋은 것들만 남기고 왜곡해왔던 것도 알았어.
*
ㅇㅇ고등학교 : 열등감 덩어리인 나를 진심으로 안아주고 성장시킨 그 학교. 졸업생 중 누구는 은행, 농협, 수협, 신협에 가고 누구는 반월공단 경리로 가고 누구는 공돌이, 공순이가 됐어. 시간이 지나며 대학 진학하는 아이가 줄자 새 교장은 인문계반을 없애고 공고로 바꿨어. 인문계반 교실의 책걸상은 선반이나 밀링머신으로 교체됐고 드럼과 앰프가 있던 과학실엔 자동차 엔진 모형이 놓였어. 하지만 여전히 학교 뒷산엔 담배꽁초들이 있는 걸 보니 비밀스러운 전통은 잘 이어지는 것 같아.
근배형 : 1, 2학년에게는 박근배, 3학년에겐 근배형, 졸업생에겐 근배옹으로 불리던 교장이 그 시골 학교로 부임 오신 계기가 높은 사람들 말을 잘 듣지 않아 문책성 인사를 당해서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어. 내가 돈 벌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근배 옹한테 받았던 장학금을 갚으라는 연락을 받았어. 또 근배 옹이 사 주신 당구대에서 당구를 친 아이들에게도 연락이 갔지. 당구비 내놓으라고. 우리가 모아 보낸 돈으로 후배들을 위한 장학금이 조성됐어. 그가 퇴직을 하고 안양유원지 입구 전원 마을에 정착하셨을 때 마당에서 잔치를 벌였어. 돌아가시기 전까지 생신 때마다 동네 어귀에 동창 명의의 생신 축하 현수막이 걸렸어.
장뽀리 : 학생회장이자 동창회장이면서 모든 동창들의 연인. 졸업 후 은행에 취업했고 지금은 꽤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데도 아직 카톡 프로필에 <John Ver존버>라는 문구를 달고 살지.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문구점이 망하자. 적금을 깨서 그 자리에 설렁탕집을 차려드렸어. 아직도 동창모임의 1차 장소는 여전히 그 집이고 그 집 음식을 가장 자주 먹는 사람도 나야. 음식이 맛있어서 이기도 하지만 그녀가 수없이 뽀리해 나른 소주와 담배의 공덕이라는 후문. 인희씨 결혼 소식 들은 내가 술 먹고 울던 날, 즉석에서 자기 언니를 소개해 준 오지라퍼.
장깨 : 다리 수술하고 고향에 내려갔지만 새엄마와의 불화로 다시 뛰쳐나와 서울로 올라와 시작한 일이 어이없게도 다시 중국집 배달이었대. 장안동에서 시작된 배달이 면목동으로, 망우리로 변두리만 찾아 옮겨 가더니 결국 팔당대교 근처까지 밀려갔다지. 중식 요리를 배워 중국집을 차리겠다는 야심을 품었었는데 쌀 국숫집을 차리게 될 줄이야. 베트남 아가씨랑 결혼했거든. 근데 그 아가씨 손이 야무진 것도 모자라 쌀국수 선수야. 장깨는 여전히 배달을 하고 있어. 옛날과의 차이라면 자전거에서 1200만 원짜리 오토바이로 바뀌었다는 거. 가죽점퍼에 부츠 신은 아내를 뒤에 태운 그가 뿌다다다당 소리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날 찾아왔을 때, 찰스 브론슨이 살아온 줄 알았어. 녀석은 여전히 멋있고, 쾌활해. 그 많던 머리숱이 황망히 사라져 더 이상 똑딱 핀을 꽂을 수 없다는 비애만 빼고. 국숫집으로 버는 돈이 내 월급보다 많은 게 확실한데 옛날 내가 목수 걸고 해준 병원비 갚을 생각을 안 해. 돈 받긴 글렀고 그 액수만큼의 쌀국수를 공짜로 먹을 생각이야.
<장깨가 빼닮은 찰스 브론슨. 여기에서 머리카락만 없다고 상상해 보렴.ㅋ>
인희씨 : 강남에 아파트가 있다는 증권회사 직원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은행을 퇴직했어. 아버지가 정해준 남자와 결혼했지만 정작 남편은 아버지 같지 않았나 봐.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못 이룬 꿈이었던 드라마 극본 공부를 시작했지만 남편은 용인하지 않았어. 그녀가 공들여 쓴 작품을 컴퓨터에서 지워버린 거야. 다시 안 살 마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갔지만 아버지 명령에 다시 돌아갔다지. IMF 이후 실직한 남편이 투자 회사를 설립했는데 쉽지 않았나 봐. 친정 부모님이 재산을 처분해 꽤 큰돈을 보태주셨지만 결국 파산했어. 불화가 시작되었을 거야. 이혼하고 친정으로 들어갔지. 두고 온 아이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술을 마셨고 알코올성 우울증 진단을 받았어. 폭식으로 불어난 체중을 줄이기 위해 굶기를 반복하며 몸도 무너져갔어. 아이들이 사춘기가 되자 감당 못하게 된 남편이 결국 그녀에게 보내주었고 안정을 찾은 그녀는 다시 드라마 극본에 매달렸어. 몇 년 뒤 당선되어 라디오와 TV에 이름이 나왔고 이를 본 내가 연락했지. 지금은 프리랜서가 되어 지상파, 종편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일하며 아이들과 부모를 책임지는 <생계형 작가>로 살고 있어. 유복하던 그녀의 형편은 지금 서민의 살림살이가 되었어.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자신에 비해 지금의 내 삶은 좀 나아 보이는지 가끔 시샘 하는 걸 볼 때마다 이런 모습이 있었나, 놀라곤 해. 열일곱 살의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 아냐, 그땐 나도 보는 눈이 없었을지 몰라. 첫사랑의 이상화가 가능할 수 있는 건 가려진 이면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어린 나이와도 관계가 있을까. 억척스러운 그녀를 보면 내 엄마의 삶이 떠올라. 인희씨도 딱 한 번 나와 결혼할 생각을 한 적이 있대. 하지만 부모님께 말하기도 전에 불가능한 걸로 결론 내렸대. 내가 보내는 편지를 그녀 아버지가 보신 거야. 익숙한 이름이다 싶어 장학금 신청 서류를 찾아보셨다지. 구구절절 쓴 소개서를 읽고 안 된다고 하시더래. 가난한 사람은 반드시 티가 나게 마련이라고. 너무 부자도 불편하지만 가난한 건 절대 안 된다고. 내가 대학생인 척했으면, 장학금 신청을 안 해서 그녀 부모님이 나의 가난을 모르셨으면 그녀와 어떻게 되었을 수도 있었을까. 모르겠어. 그녀는 내 편지를 모아두지 않았어. 무주에서 찍었던 사진도. 모든 편지를 모아 두고 함께 갔던 곳의 입장권을 일기장에 붙이고 함께 갔던 곳이라면 경양식집 종이 티슈나 커피숍 성냥까지 모아둔 나와 다르지. 하지만 그걸로 내가 그녀를 더 사랑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도 모르겠어. 내가 사랑한 건 절반이 그녀고 절반은 그녀에게 집착하는 나였을지도 몰라.
*
이 글을 쓰면서 난 고스란히 그 시절과 마주했어. 한편 덤덤할 줄 알았어.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일도 없고 그때 나를 가뒀던 결핍의 그림자 밖으로 안전하게 벗어나 있으니까. 그런데도 중간중간 내가 그곳에 강제 소환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어. 그럴 땐 아팠어. 하지만 그때로 돌아가 장깨, 세탁소 아저씨, 인희씨, 경양식집 사장님, 근배 옹, 장뽀리처럼 내 편이 되어주었던 존재들과 만나는 것도 좋았어. 오래된 일기를 보는 느낌은 그런 건 가 봐. 혹시 너희 중 누군가가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면 나도 응원할 거야. 지금깟시 살아온 인생이 참 길지? 앞으로도 길거야. 사람의 앞날은 참 모를 일이지. 태어났을 때 저절로 주어졌던 행복이 스산한 불행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그 반대가 되기도 하니까. 오늘 죽고 싶은 일이 며칠 뒤엔 살아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할 거야. 행과 불행이 몇 번이고 뒤엎어질 만큼 무상한 것이 인생이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