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중기가 끝나갈 무렵의 평화로운 주말 아침
시어머니께서 유튜브 영상의 링크 하나를 보내셨다.
링크를 따라 들어가 보니 자연분만을 하면 수많은 유익균을
아기에게 전달해줄 수 있다는 '유익한' 정보가 담긴 영상이 있었다.
시어머니께서는 영상만 보내셨을 뿐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하지만 대부분의 대한민국의 며느리들은
그 영상 뒤에 담긴 무언의 압박을 단번에 읽어낼 수 있다.
당시에는 약간의 반발심이 생기기도 했었다.
원래 공부하라는 소리를 들으면 더 놀고만 싶어지는 법이다.
시어머니께서 보내주신 영상과 상관없이
중학생 때 우연히 임신과 출산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본 뒤로
만약 출산을 하게 된다면 반드시 자연분만을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나와 내 아이를 위해서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스스로 신념을 가지고 출산을 주도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안타깝게도 이 생각은 몇 주 뒤 산산조각이 났다.
임신 30주가 넘어갈 무렵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마주했다.
"아기 머리가 커서 자연분만이 힘들어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다니...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이는 내가 얼마나 오만한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대목이다.
나는 300만 엄마들의 소통 공간을 찾았다.
'자연분만', '머리 큰 아기'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하여
나오는 글들을 샅샅이 찾아 읽었다.
맙소사!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산모들이 굉장히 많았다.
출산은 엄마가 선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늘이 정해주고, 아기가 선택하는 것이었다.
머리가 커서, 어깨가 좁아서, 아기가 뒤집어져 있어서,
아기가 너무 커서, 아기가 너무 작아서, 골반이 좁아서...
수많은 이유로 출산 방식이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쯤에서 포기했어야 했는데
어리석게도 나는 자연분만을 꼭 하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노력으로 안 되는 게 어딨어!
나는 엄마니까 다 할 수 있어!
어디선가 '모성애' 비슷한 것도 생겨났다.
주치의 선생님께서는 아기 머리가 100명 중 1등으로 큰 수준이었고,
꼭 자연분만을 하고 싶다면 매일 2-3시간씩 무리한 운동을 하라고 하셨다.
동산 오르기, 계단 오르기, 짐볼 타기, 걸레질 등등
그 모든 것들을 해보았다.
매일 2시간씩 걷고, 분만을 촉진하는 요가도 하고
거실, 베란다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걸레질도 해보았다.
하지만 아기는 세상에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아기의 머리는 속절없이 커져만 갔다.
병원 가는 길은 숙제를 하지 못한 초등학생의 무거운 등굣길이었다.
남편과 함께 평소보다 더 무리한 운동을 한 어느 날
예정일을 10일 앞둔 우리 아기가 태어났다.
결국 내 고집대로 자연분만을 하긴 했지만
나는 회음부에 남들보다 훨씬 큰 상처를 입었고,
아기는 40주를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는 바람에
다른 아기들보다 힘든 시기를 몇 주간 보내야 했다.
자연분만을 '성공'했다고 말하기엔 나와 아기는 둘 다 만신창이 가까웠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확실히 느낀 게 있다.
아무렇지 않게 출산의 방법을 묻거나 권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왕절개를 선택한 산모들에게 '자연분만이 아기에게 더 좋지 않아?'라는 말을 한다든지
자연분만을 선택한 산모들에게 '괜히 사서 고생하는 거 아니야?'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말자.
자연분만이 제왕절개보다 더 좋은 지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자연분만의 장점이 제왕절개보다 월등히 많다면
엄마들은 목숨을 걸고라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까.
실제로 출산 방식에 따른 차이가 미미하다고 밝힌 논문들도 많다.
지금까지 생각지 못했던 일이지만
너무나 개인적이고 무례한 질문이고, 이에 대해 묻거나 밝힐 필요도 없는 것이다.
이는 종교나 정치성향을 묻는 것처럼 쉽게 건드리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어떤 방식이든 산모와 아기가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그뿐인 것이다.
<에필로그>
퇴고를 남편에게 부탁했고 글을 읽어본 남편이 물었다.
'그럼 다시 돌아가면 제왕 절개할 거야?'
나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