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맹이의 머리가 커질수록 나의 걱정도 커져만 갔다.
자연분만이 불가능하다고 하면 속 편하게 수술 날을 잡고
그때까지 맛있는 음식이나 실컷 먹고 마지막 자유를 만끽했을 텐데
자궁의 상태가 머리가 (100명 중에 1등으로)큰 아기를 출산하기에도
나쁘지 않다는 주치의 선생님의 소견을 들었을 때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태릉선수촌의 국가대표들처럼 운동을 했다.
러닝머신, 계단 오르기, 짐볼 운동, 걸레질...
하루도 빠짐없이 성실하고 집요하게...
임용고시를 준비하던 2년 동안
매일 같은 루틴으로 공부를 해온 나에게
이런 일은 매우 쉬운 성질의 것이었다.
화창한 4월의 월요일
휴가를 받은 남편과 근처의 하천을 따라 산책을 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그동안 가보고 싶었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미뤄왔던 집안일을 했다.
출산 가방을 싸고, 차에 카시트를 설치했다.
아기 침대의 잠자리를 마련하였고, 집안 곳곳의 청소를 했다.
아직 예정일은 2주나 남은 상황이었고 출산의 징조는 전혀 없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선견지명 같은 게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일지 몰라 남편에게는 골프 연습을 다녀오라고 한 뒤
치킨을 시켜먹었다. 이때까지도 진통 따위는 전혀 없었다.
잠이 들 무렵부터 슬슬 배가 아프기 시작했는데
나도 남편도 이게 진통인지 몰라 장난치듯 웃고 있었다.
그러다 혹시 몰라 병원으로 출발하였고,
도착하고 나서 약 3시간 만에 꼬맹이를 만나게 되었다.
분만을 마치고 입원실로 와서 침대에 누웠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진통도 길지 않았고, 출산도 나름 수월했기 때문에
내가 효자를 낳은 거라고 기뻐했다.
이렇게 글로 적어놓고 보니 나의 출산 무용담은 담백하기 그지없다.
산모와 아기가 건강하다는 소식을 들은 가족과 친지들, 친구와 동료들이
전국 각지에서 선물을 보내주고, 연락을 해왔다.
내가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일을 해냈나 하는 마음에 우쭐했고,
들뜬 기분에 내가 어떤 처지에 놓인 것인지 자각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몸은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온몸의 뼈마디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떤 자세를 취해도 불편하였다.
사실 불편한 수준이 아니었다.
온몸이 고장 난 것 같았다.
어떤 방식으로, 어떤 산모가 어떤 아기를 낳는다 해도
아무 탈 없이 순조롭게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임신 기간 내내 입덧으로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는 산모도 있고,
진통으로 오랜 시간 진을 빼는 산모도 있다.
제왕절개로 비가 올 때마다 욱신거리는 후유증을 겪는 산모도 있고,
자연분만으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산모도 있다.
애초에 '순산'이라는 건 없다.
방식이 다를 뿐 오직 고생하는 산모만 존재한다.
다행히 그 정도가 아주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죽지 않고 살아난 것에 감사하며
곧 다가올 수많은 난관들을 알지 못한 채
인생의 가장 힘든 고비를 넘겼다고 착각하던 나였다.
<에필로그>
출산 직후 분만실에서
나: 아기 머리 커?
남편: 아니 이제 그런거 상관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