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내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고 믿었던
그 당시의 나는 놀랍게도 임신을 계획한 날부터 임신을 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감이 발달된 예민 보스인 나는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내 몸의 변화를 감지하기 시작했다.
체온 변화를 수시로 체크하고, 배 속의 작은 움직임도 놓치지 않으려 애를 썼다.
다음날 오후부터 배가 콕콕 아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휴대폰 메모장에 적어두었다.
300만 엄마들의 소통 공간이라는 맘 카페에 가입도 하였다.
2-3일이 지나면서 약간 어지럽다고 느꼈고,
아랫배가 아주 조금 묵직한 느낌이 있었으며 가슴통증을 느꼈다.
또한, 가끔 하체가 뻐근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나의 이런 증상과 맘 카페 맘님들의 임신 초기 증상을 비교해가며 임신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만삭인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고작 이 정도의 증상들을 '통증'이라고 적어두었던 게 참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다.
하지만 임신임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최소 7일에서 10일간의 기다림이 필요했다.
그 날들을 참고 기다리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임신테스트기를 사 오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마 7일을 채 기다리지 못하고 임신테스트기를 5개쯤은 사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루하루를 각종 증상 놀이에 시달리다
나는 급기야 남편에게 엉뚱한 제안을 한다.
"우리 부석사에 다녀오자"
나는 본래 '미리부터없는걱정사서하기병'의 중증 환자로 이 병의 진행 말기에 가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것에 의존하려는 이상행동을 보인다.
'생명의 탄생이란 과학과 의학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신의 영역이기도 하지 않냐.'는 궤변을 시작으로
'내가 그동안 이런 거사를 치르면서
너무 편향된 노력만을 기울인 것 같다,
진화론과 창조론을 생각해 보아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설명으로 남편을 설득했다.
왜 하필 부석사냐 하면 나는 인생에서 원하는 게 있을 때
부석사의 힘을 빌리고 싶어 하는 편이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 기회에...)
종교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언젠가 나는 부석사에서 큰 영감을 받은 적 있기 때문에 그렇다.
남편은 말도 안 되는 나의 제안에 따라주었고,
우리는 코로나 시국의 예비 부모답게 차로 부석사에 가서
볼 일(치성을 드리는 것)만 해결하고 돌아오기로 했다.
부석사는 많이 변해있었다. 사람이 거의 없었던 탓인지, 8월의 뜨거운 날씨 탓인지
영험한 느낌이나 장엄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나이가 많이 들어버린 노인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우리는 법당에 들어가서 볼 일을 보고, 주변을 산책한 뒤 잽싸게 차를 타고 돌아왔다.
부석사에 다녀온 다음날이 임신테스트기로 임신을 확일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시기였고,
나는 증상 놀이를 졸업하고 임테기 지옥에 빠져들게 되었다.
<남편의 참견>
아가야, 부석사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은 멀리서 보면 반듯한 직선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부드러운 곡선이란다. 배흘림기둥처럼 곧으면서 넉넉한 사람이 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