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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 매물을 보러 갔다

집주인과의 라포 형성은 자신있거든요

by 비잉벨

500파운드와 자기만의 방을 가지게 된다면, 자유롭게 사고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정확히 쓸 용기가 생긴다면, 공용 공간을 벗어나 인간을 서로의 관계로만 보지 않고 현실과의 관계로 바라보게 된다면, (중략) 그 누구도 우리의 시야를 막을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의지할 팔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혼자서 걸어가며, 우리의 관계가 남녀의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와도 연관이 있다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올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중에서



나는 집을 잘 구하기로 소문났다. 꼼꼼하고 신중하고 예민한 성향, 그리고 약간의 직관이 이 분야에서 제대로 발휘되는 듯 했다. 내가 5년간 독립해 살던 분당동의 15평 투룸은 놀러오는 사람들마다 '이 가격에, 이 구조에, 이런 환경이라고?'하며 놀라워했다. 집 잘 구하기 능력으로 즐겨 듣는 팟캐스트 비혼세에 사연이 소개되어 진행자들의 칭찬을 받기도 했다. 집을 구할 때 고려한 점은 이러했다.

대중교통으로 회사 통근이 30분 이내에 가능한가? (실제로는 아쉽게도 도어 투 도어 40분이었다.)

도보 10분 거리에 학교, 경찰서(파출소)가 있는가? (치안,주거환경과 직결되는 요소)

도보 20분 거리에 성당, 공원이 있는가? (심리적 안정을 주는 요소)

채광이 잘 되며, 집에서 밖을 내다볼 때 창문 풍경에 문제가 없는가? (문제라 함은 : 다른 집이 너무 가깝거나, 행인들 눈높이와 가깝거나, 기타 본인 기준에 불편감을 주는 건물이 없는지.)

준비된 예산에 맞는가?


작업실을 구할 때는 이러한 기준을 세우고 온라인(네이버 부동산)으로 매물을 검색했다. 이 동네는 이미 너무 잘 아는 곳이었으므로 바로 디테일로 들어갔다.

집에서 도보 15분 이내의 거리인가?

화장실, 싱크대 단독 사용이 가능한가?

지하철역에서 걸어올만한 거리인가?

5평 이상의 공간인가?

밤/낮 모두 주변이 조용한가?


내가 구한 작업실은 이 조건을 모두 만족했다. 사실 더 시간을 두고 매물을 보러 다닐 마음의 여유가 없기도 했다. 이 가격에 나오는 매물은 진짜 반지하 아니면 지하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여긴 나름 가짜(?) 반지하였다. (건물 자체가 경사진 길에 지어져 지하층으로 출입 가능한 오피스텔이다.) 망설이지 않고 다음 날 바로 부동산에 전화를 드려 계약하겠다고 했다.


오피스텔은 미아동이었지만 부동산이 방학동에 있어 분당에서 방학역까지 거의 2시간 거리를 가야 했다. 매물을 볼 때 한 번 뵈었던, 큰어머니 연세 정도의 집주인 사모님은 40대 정도의 따님과 함께 오셨다. 혹시 마음이 바뀌어 방을 내놓기 싫으신가 싶을 정도로 두 분은 방어적이고 조심스러워 보였다. 아니면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그럴리가 없는데? 아마도 '작업실로 쓸 거예요' 라는 말을 수상하게 여기신 듯 했다. 여기서 사는 게 아니라 일만 한다고? 아니요 일도 하고 공부도 하고 가끔 모임도... 말할 수록 사실 설명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싹싹하고 무해한 세입자임을 열심히 어필하며 계약서 작성 동안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눠야 했다. 평소라면 질색하는 결혼/애인 유무 토크에도 철판을 깔고 임했다. 이런 저런 스몰톡을 하다가 결국 공통점을 찾아냈다. 내가 계약서에 쓴 부모님 집 주소를 보시더니 사모님이 작게 한 마디를 건네신 것을 꽉 물어버린 것이다.


"거기 살아요? 우리 가게 하는 동네인데."

"이 동네에서 가게 하세요? 저 오래 살아서 모르는 데 없는데. 어디 하세요?"

"인테리어집 해요."

"인테리어...인테리어...?목욕탕 앞이요?"

"어머나?"

"소아과 건너편!"

"어머어머? 왠일이야. 이웃이었네?"


알고보니 오래 이웃으로 지낸 사이였다는 이유로 두 분은 내게 경계심을 많이 풀었고, 그 날 계약을 훈훈하게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고 후련하게 부동산을 나왔다. 작업실 구하기에서 의외로 중요한 것은 건물주와의 라포 형성이다. 이렇게 쌓아둔 라포는 훗날 폭우로 인한 누수/누전 사건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월셋집 방을 빼기로 한 날은 이제 한 달 남았고, 나에게는 돌아갈 부모님의 집 방 한 칸과 독립적인 작업실이 드디어 생겼다. 작업실을 계약하고 이름을 지었다. 미아동에 있는 아지트, 미아지트. 같이 쉐어하기로 한 친구와, 브랜딩 모임 친구들에게 작업실 이름을 알려주었다. 다들 환영하고 축하해 주어 고마웠다. 내 첫 작업실 미아지트에서는 어떤 일을 해 내고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보다 훨씬 더 이 공간은 나에게 큰 가치를 주었다. 그것은 바로 고독할 수 있는 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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