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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태생이라는 특권

부모님이 상경한 덕을 가장 크게 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내가 아닐까?

by 비잉벨

지금으로부터 수십년 전,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각각 충남 서천과 전북 정읍에서 상경했다. 20대의 그들은 어수룩하고 순박했을까? 아니면 주변을 경계하느라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잔뜩 예민했을까? 가진 것 없던 그네들은 요령없이 열심히만 살다가 친지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 그리고 서울 도봉구의 작은 셋방에서 신혼 살림을 시작했다.



신혼집에 처음으로 와 본 정읍 할아버지는 한숨을 푹푹 쉬며 마당에 나가 줄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햇빛을 쬐면 어지럼증을 느낀다고, 밭일도 안 시키며 학교갈 땐 머리를 빗겨 땋아 주며 곱게 키운 딸이 큰 도시로 올라가 이 작고 초라한 방에 서 산적같은 사위놈과 산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쓰렸던 것이다. 신혼부부의 셋방은 시댁에서 매우 가까웠다. 거침없던 성격의 두 분은 막내 아들 부부의 집을 제 집마냥 드나들고 잔심부름을 시켜댔을 것이다. 이제는 모두 다 돌아가신 분들의 옛날 이야기므로, 세 분이 하늘에서 내려다 보시다 언짢으실 수 있으니 이쯤 하도록 하겠다.



부모님이 상경한 덕을 가장 크게 본 것은 다름아닌 바로 내가 아닐까? 첫 아이를 낳고 도봉구 창동의 셋방에서 미아동의 빌라로 평수를 넓힌 젊은 부부는 집주인에게 급한 돈이 필요해진 덕에 살던 집을 조금 저렴하게 매입하게 되었다. 아직도 그 구두 계약의 순간이 기억난다. 집 거실에서 집주인 부부와 엄마 아빠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무릎에 앉아 있었는데, 엄마는 내게 '아라야. 이제 여기 우리집이 됐어.' 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집은 아직까지도 우리집이다. 나는 덕분에 서울 미아동의 집에서 초,중,고,대학교까지 편하게 다녔다. 서울에 사는 것이 특권이라는 것은 대학에서 처음으로 어렴풋이 느꼈다. 의정부, 일산, 남양주, 인천 등에서 통학을 하는 친구들의 고단한 얼굴을 볼 때, 나는 지하철과 마을버스를 타고 50분이면 학교에 도착하니 운이 좋은 편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첫 직장도 당연히 서울이었다. 입사한지 3개월 만에 25살의 나는 매일 울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회사 다니기 싫어요. 엉엉엉. 때로는 엄마가, 때로는 아빠가 위로해 주셨다. 서울에 산다는 것은 주거 문제로 경제적인 부담이 덜어진다는 것 뿐만 아니라, 나를 잘 아는 어른들이 나의 괴로움을 실시간으로 발견하고 돌보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특권이 분명했다.




5년만에 다시 돌아온 캥거루가 되기로 결심했을때, 이사를 준비하며 정신없던 즈음 프리랜서 동료 파랑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새삼 내가 가진 특권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나를 쓰는 전시 명상>이라는 프로그램을 공동 기획했고, 첫 오프라인 모임 진행을 앞두고 국립중앙박물관 앞 투썸플레이스에서 샌드위치와 파니니 따위로 요기를 때우고 있었다. 나 집에 다시 들어가기 싫어요. 겁나요. 한참 불평 불만을 늘어 놓는데 그가 말했다. '그래도 아라님, 돌아갈 수 있는 집이 서울에 있잖아.' 그의 고향은 청주였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넷플릭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에서 그린 서울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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